[문화&사람] 이화정 극단 아토(atto) 대표

“아토는 선물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에요. 영어로는 ‘atto’라고 쓰는데 알파벳 ‘a’와 ‘t’가 들어가서 art, acting, teaching 등을 만들잖아요. 그런 단어들이 좋아요”

극단 아토(atto)의 이화정(43ㆍ사진) 대표를 지난 16일 만났다.

불혹(不惑)에 나에게 준 선물

▲ 이화정 극단 아토(atto) 대표
“서른아홉에 연극을 정리하고 인연을 다 끊었어요. 그러고 나서 1년을 집에 박혀 살다보니 시간이 아까운 거예요. 마흔 살에 내 인생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행복하려고 선택한 것들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더라고요. 그렇다면 정리해야지요”

이 대표는 마흔이 되던 해, 무작정 인도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첫 행선지는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였다.

“더 나이 들면 용기가 없어져 배낭여행을 포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일단 저지르지 않으면 또 주저앉을 것 같아서 앞뒤 가리지 않고 여행길에 올랐어요. 왜 인도냐고요? 여행하기 가장 어려운 나라라고 하더라고요. 그냥 끝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었죠”

이 대표는 대학시절부터 4대 문명 발상지를 다 돌아봐야겠다는 꿈을 꿨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 다니면서 중국 황하문명을 접했고, 다음으로 인더스문명을 느끼고 싶었다.

히말라야에서 느낀 감동을 설명하는 이 대표의 눈은 그때가 떠오르는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자연이 주는 감동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숙소를 나와 노숙자처럼 침낭에 누워 떨어지는 별을 보며 펑펑 울었어요. 어느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게 없더라고요. 감사하는 마음을 크게 배운 여행이었습니다. 연극이라는 것이 나를 힘들게 해서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연극에 대한 가치와 감사를 절실히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6개월 동안의 인도여행은, 내가 나에게 준 꽤 괜찮은 아토였죠”

이립(而立)에 선택한 연극

▲ 이화정 극단 아토(atto) 대표
이 대표가 서른두 살 되던 해, 극단 학전에서는 뮤지컬 ‘지하철1호선’에 함께 할 배우를 모집했다. 삶이 무료하다고 생각하던 때, 이 대표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오디션 자체가 궁금해 지원했다. 1차에 합격하고 2차에도 붙고 나니 전의가 생겼다.

“전문 배우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4차인 최종까지 가고 싶더라고요. 11명 모집에 300명이 넘게 지원했는데, 제가 뽑힌 거예요.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하는 인생의 기로에 선 거죠”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치웠을 때의 경제적 어려움과 가족ㆍ친지들의 실망 등이 갈등하게 했지만, 당시 같은 부서 부장의 응원이 귀에 꽂혔다. ‘난 화정씨의 선택을 존중해. 잘 선택했어. 꿈을 쫒아가. 응원할게’
이 대표는 ‘지하철1호선’ 공연을 마치고 2004년 (사)장준하기념사업회에서 준비한 뮤지컬 ‘청년 장준하’에 함께 했고, 그 이듬해 뮤지컬 ‘블루 사이공’에도 출연했다.

“좋은 작품을 연거푸 만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지만 배우로서 기량의 한계를 느껴 갈등이 심했습니다. 사실 20대 초반부터 10년을 전문적으로 해 온 배우들과 단순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지만, 자괴감을 많이 느꼈어요. 교만과 오만이 만든 불행이었던 거죠”

게다가 경제적 어려움은 생각보다 견디기 쉽지 않았다. 연극인의 봉급으로는 좋아하던 스파게티와 아이스크림조차 맘 편하게 먹지 못했다.

“2005년쯤이었나요? 그 때는 사람들 만나면 제 소개를 ‘연봉 90만원인 삼류배우 이화정입니다’라고 했어요”

서울에서 배우로 사는 게 힘들었던 이 대표는 고향인 인천으로 내려와 인하대학교 앞에서 막내 동생과 가게를 차렸다. 그 전에는 우리나라 배우들이 게을러서 자기개발을 안 한다고 생각했는데, 안정적인 수입이 없으니 실력 향상을 위한 수업을 듣는 건 꿈같은 현실이었던 것이다.

대학로에선 잘됐던 프랜차이즈로 가게를 열었지만, 쉽지 않았다. 동생은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싶다고 해, 이 대표 혼자 업종을 바꿔 가게를 운영했다. 3~4년 애쓰다보니 가게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연극에 대한 열망이 다시 샘솟기 시작했다.

“앞치마 두르고 슬리퍼 신고 장사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같이 연극하던 후배가 ‘인천의 한 극단에서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데 여배우 한 명이 모자란다’며 저를 어디로 끌고 간 거예요. 장사 차림에 끌려가 인사한 사람이 현 인천연극협회 회장인 이재상 연출가였죠”

이 대표는 이재상 회장과 극단 미르를 함께 창단해 활동했다. 진정성 있게 연극을 했던 사람들을 만나 활동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살갗이 얇은, 감수성이 풍부한 예술가들과의 관계는 쉽지 않았고, 게다가 개인적인 어려움이 생겨 연극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즈음, 연극과 가게를 정리한 후 인도여행을 떠난 것이다.

약관(弱冠)에 불붙기 시작한 열정

인천에서 태어나 초ㆍ중ㆍ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대표는 지금까지 남부럽지 않은 윤택한 삶을 살았다.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던 해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이 난 1995년에 취직했어요. 사건사고가 많던 때라 정신없이 살았죠. 그러다 기획기사를 쓰는 부서에 배치돼 문화 기사를 쓰게 됐어요. 원래 문화에 관심도 많아 좋은 공연을 맘껏 보면서 기사를 쓰다가 어느 순간, 제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뭔가를 아는 듯 글을 쓰지만 너무 얕은 지식에 스스로 갈증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예술대학원에서 연극평론을 전공하며 연극에 대한 깊이를 더해가고 있을 때, 어떤 교수가 지나가는 말로 ‘연기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연극을 관람하면서 속마음 한쪽에는 ‘무대 위에서 깃발이라도 들고 서 있으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이라, 교수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다.

“갑자기 기자 생활이 ‘사진공장’에 다니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사건이 터지면 어떤 앵글로 어떻게 찍는지가 빤한 이 생활이 무료했을 때였거든요. 정년까지 이 직장에 있으면 안정적이고 연봉이 높아지긴 하겠지만 그 당시 제게는 탈출구가 필요했던 거 같아요”

연극으로 청소년들의 정서 자극

▲ 이화정 극단 아토(atto) 대표
“서울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데 단체관람을 하러온 학생들이 있었어요. 어디서 왔냐고 물었더니, 인천에서 왔다는 거예요. 그때는 ‘인천에서 서울까지 왔나?’ 하고 지나쳤는데, 제가 인천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연극을 교육하다 보니 그 때 장면이 되살아나더라고요”

서울은 문화적 인프라가 풍성해 누릴 수 있는 게 많은 반면, 인천지역은 아직 그렇지 않다는 게 이 대표의 판단이다.

“중ㆍ고등학교 때가 가장 감수성 예민하고 자아가 생기는 중요한 시기잖아요. 예술적이고 인문학적인 게 필요한 시기에 인천의 아이들은 어디서든 제공받는 게 별로 없어요. 고전을 읽는 게 쉽지 않다면 연극이란 매체로 인문학적으로, 감성적으로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대표는 청소년부터 볼 수 있는 연극을 만들 계획이다. 어릴 때부터 교육이나 훈련이 돼있지 않으면 성인이 된 후 접근하기는 쉽지 않은 게 예술이기 때문이란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볼 수 있는 공연을 하는 팀을 만들고 싶어요. 연극이란 매체는 영화와 달리 접근하는 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인생에 처음 만나는 연극이 정말 중요한 거죠”

학생들이 ‘연극이 재미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연극, 자극적인 내용으로 흥행을 염두에 놓기 보다는 청소년을 위해 잘 만든 연극을 하겠다는 포부가 크다.

“동인천 홍예문 아래에 있는 인성여고를 나왔어요. 학교 다닐 때는 인근에 소극장들이 많았어요. 청소년 할인권을 갖고 음악감상실도 가고 서점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적 감수성을 키워나갔어요”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삶의 철학이나 지향점 없이 물질을 우선시하는 것 같아, 이 대표는 걱정한다. 아이들의 미래는 곧 우리의 미래이기에 후대를 위한 교육 사업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요즘 특정 인터넷 사이트를 사용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우려가 높잖아요. 인문학적 소양이 없고 역사의식이 없어서인 거죠. 우리나라 역사 인식이나 가치관 형성에 도움을 줄만한 연극, 아이들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작년 12월, 이런 이유로 이 대표는 아토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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