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난 ‘교양의 여왕’이었다. 예의가 바르거나 상식이 풍부해서가 아니다. 대학시절 선택한 학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 전공 필수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학점을 ‘교양’ 과목으로 채운 것이다. 문학ㆍ지구과학ㆍ아동심리ㆍ일본문화ㆍ호신술ㆍ에어로빅 등, 종류도 다양한 이 과목들은 내게 앎의 즐거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공으로 무너진 학점을 일으켜 세우는 데에도 공헌했다.

그 중에서 한 수업이 기억난다. 생활체육 과목이었다. 교수님은 ‘마라톤과 식이요법’에 대해 설명했다. 그냥 달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래선 중도에 포기하기 십상이라고 했다.

마라톤 완주는 평소 체력이 강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달리는 도중 몸속에 저장된 에너지원이 바닥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라토너들은 대회 일주일 전부터 식이요법과 운동을 병행한다. 식이요법이란 바로 에너지원인 몸속 글리코겐 저장량을 최대로 만드는 것이다.

인류는 몸속에 가능한 한 많은 에너지를 저장하도록 진화했다. 음식으로 섭취한 탄수화물은 포도당으로 분해돼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고, 남은 것은 간과 근육에 차곡차곡 쌓인다. 이때 포도당을 압축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압축한 ‘저장형 포도당’을 글리코겐이라 부른다.

 
운동과 동시에 우리 몸속의 글리코겐이 소모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42.195km를 달리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다. 30~35km 지점 전후로 글리코겐이 모두 고갈돼 마라토너들은 극한에 부딪힌다. 이때부턴 체내 지방이 이를 대신한다. 하지만 지방을 분해하려면 글리코겐보다 더 많은 산소가 필요하다. 운동 능력이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근육의 피로감은 말로 다 못한다. 한 번 시작한 운동을 언제까지, 어떤 속도와 힘으로 유지하느냐는 몸속 글리코겐 저장량이 좌우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글리코겐 저장량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것이 관건이다. 저장량을 높이기 위해선 역설적이게도, 그 직전에 저장량을 0에 가깝게 만들어놔야 한다.

마라토너들은 대회 일주일 전부터 식이요법에 들어간다. 처음 3~4일은 식사 중 탄수화물을 최대한 줄이고 운동량을 늘린다. 탄수화물이 부족해진 몸에 빨간불이 들어온다. 어쩔 수 없이 저장된 글리코겐을 꺼내 사용한다. 글리코겐이 바닥날 즈음, 이제부턴 운동은 거의 하지 않고 대신 탄수화물을 왕창 먹는다. 이렇게 나머지 3~4일을 보내면 대회 직전 글리코겐 저장량은 평소의 두 배 가까이 껑충 뛴다. 이론상 완벽에 가까운 이 방법으로 1980년대 마라톤 기록이 크게 단축됐다고 한다. 하지만 선수들에게 몸이 무거운 느낌과 우울감을 줘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단점도 있다.

이 글을 쓰느라 그날 필기한 공책을 오랜 만에 다시 펼쳐 보았다. ‘마라톤에 이런 과학이 숨어 있다니!’ 하며 놀라워하던 그날의 흥분이 떠오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는 만큼 뭔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한여름 더위로 주춤했던 마라톤대회가 다시 고개를 든다. 해마다 전국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가 400여개, 참여 인구만 해도 10만에 달한다고 한다. 혹여,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마라톤대회에 참여할 분이 계신다면, 이 방법을 한번 시도해보시길 조심스레 권한다. 아, 물론 내가 직접 달릴 수도 있지만, 러닝화가 없다는 핑계를 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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