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틈새여행 함께 가는 틈새여행 ③


주5일 근무 등으로 가족단위의 나들이가 늘어가고 있지만 정작 지역 내에서 갈만한 곳이 마땅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이에 따라 인천지역과 주변에서 적은 비용과 시간으로 가족들이 찾아갈 수 있는 곳을 찾아 제공하고자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맥아더 동상, 한중 문화원, 홍예문, 차이나타운 등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자유공원’은 많은 이들에게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곳이다.

특히 자유공원은 학교 소풍지로 빠지지 않았던 곳으로 인천에서 성장한 부모 세대들은 이곳에서 찍은 사진 한 장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게다. 또 남몰래 데이트를 즐겼던 곳이기도 하고, 월미도 앞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기억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아이들에게 자유공원은 어떠한 곳이며, 어떠한 느낌을 주고 있을까? 그저 인천 앞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만 알고 있을 아이들과 함께 역사 속의 자유공원과 월미도 부근을 새로운 시선으로 둘러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 예전에 들러보았던 장소일지라도 전혀 다른 느낌과 감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와 일본 조계지를 나누는 경계단

불운의 역사를 간직한 최초의 서양식 공원, 자유공원
인천시 중구 송월동과 북성동 등을 감싸 안은 산이 바로 ‘응봉산’인데, 이 일대를 자유공원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자유공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란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응봉산이 공원으로 유명해진 것은 개항이후 이 일대에 외국인들이 조계(租界)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조계란, 개항장 등에 외국인이 자유롭게 거주하면서 각 국 나름의 구역을 설정하고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한 것을 말한다. 자유공원 부근에서는 우선 1883년 청국과 일본이 공원 앞쪽의 선린동 일대에 조계를 설정했으며 영국과 미국, 독일도 서둘러 해안지대와 응봉산 자락 14만여 평을 쪼개 조계로 만들었다. 지금의 차이나타운에서 자유공원이 연결되는 지점에 있는 조계지 경계단을 중심으로 왼쪽은 청나라, 오른쪽은 일본 조계지의 건물들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양식들로 번화하게 들어서 있었다. 현재도 조계지의 흔적인 양 국의 전통가옥을 볼 수 있다.

이렇듯 개항과 동시에 타국의 이방인들이 버젓이 자리를 차지한 이곳, 자유공원의 초기 이름은 만국공원(萬國公園)이었다. 인천시가 1957년에 자유공원(自由公園)으로 이름을 바꿨다.

자유공원에 올라서면 인천 앞바다 반대편으로 하얀색 건물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기상대인 ‘인천기상대’의 모습이다.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옆에 위치해 있는 이 기상대는 일제가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전략수립의 방편으로 임시 기상관측소로 세운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자유공원 광장 뒤편에는 아담한 건물의 중구 문화원이 있는데, 이곳은 1901년 당시 거주하던 미국, 독일인 등이 사교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물포 구락부’로 건립했던 곳이다. 사교장으로 쓰였던 당시에는 이곳에 도서실·당구대 등의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또 문화원 앞쪽에는 한때 인천 시장 관저로 사용됐던 한옥과 그 주변이 이제 시민들에게 개방돼 고즈넉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고풍스러운 한옥 앞 잔디마당과 그 위에 놓인 흰색의 의자와 탁자, 자연스러운 돌계단이 한데 어우러져 고풍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잔디 위에 자리 잡고 책을 읽으며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


▲인천시장 관저로 사용했던 한옥


일본 은행 개조한 ‘근대건축전시관’


공원에서 동인천 방향으로 내려오면 그 유명한 ‘홍예문’을 볼 수 있다. 홍예문은 이미 자유공원의 가장 인기 있는 장소. 사진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홍예문은 생각처럼 그다지 낭만적이지는 않다. 개항 이후 조계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중앙동, 관동 등에 거주하던 일본인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만석동 방향으로 영역을 넓히기 위해 3년 동안 뚫은 문이 바로 홍예문이기 때문이다. 

월미도 방향으로 내려오면 일본인들이 운영했던 제1은행을 비롯해 제18은행, 제58은행 등이 아직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서있다. 그 중 1890년에 세워진 제18은행은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개조돼 사용되고 있다. 지난 9월 말 개관한 이 전시관은 당시의 건축방식을 그대로 볼 수 있어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나 건축에 관심 있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자유공원 부근의 옛 건물 형태와 위치 등이 미니어처와 영상 등으로 형상화되어 있어 이곳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월미도 공원 전망대에서 인천 앞바다를 담다

▶ 월미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인천앞바다의 모습


이제 월미(月尾)산으로 가자. 반달의 꼬리처럼 생겨 월미도다.
반달꼬리섬 역시 전쟁으로 인한 수난이 그대로 담겨있는 곳이다. 현대사에는 전쟁과 분단의 상처가 있는 곳이었고 조선시대 때에는 행궁이 있었던 곳이다. 행궁은 왕이 궁궐을 떠나 잠시 머무는 궁이다. 외세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가기 위한 임시 피난처이기도 했다. 지금은 행궁터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지만 대략의 옛 지도로 추측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월미도는 불운한 역사의 운명을 지닌 땅이었다. 

월미산 정상에 오르면 전망대가 있다. 저 멀리 아래로 등대가 보이고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특히 바다 한 가운데로 빠져드는 해를 바라보는 것은 꽤 운치가 있다. 전망대에서 인천과 접해있는 바다의 면면을 살펴보고, 배가 닿는 항구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역에 대한 아이들의 넓은 이해를 도와준다.

인간이 기록하는 역사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광활한 바다와 월미섬은 고난의 역사 그 현장을 다 지켜보았을 것이다.
가끔은 그 역사의 발길을 따라가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우리에게는 필요할지 모른다.


/도움말 김미경 인천문화관광해설사 

 

틈새여행 정보
문화해설사와 동행하는 역사기행

이 부근의 자세한 역사적 의미와 모습을 보고 듣기 위해서는 문화해설사와 동행하며 살펴보는 것이 가장 좋다.

중구청에서는 오는 10월 31일까지 첫째와 셋째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약 1시간 30분 동안 자유공원과 차이나타운 일대를 돌아보는 역사기행을 진행하고 있다. 학생과 일반인으로 나뉘어 문화해설사가 동행해 진행되는 이 기행은 인천역 앞에서 출발하며 참가비는 무료다.(문의 760- 7547) 만일 가족단위나 소수 인원이 별도로 역사 해설을 듣고 싶다면 자유공원 광장 바로 뒤쪽 문화원 앞에 있는 인천의 문화관광해설사 사무실을 찾으면 된다.

홈페이지(www.incheonculture.com)로 미리 예약하면 문화해설사의 동행으로 더욱 생생한 해설과 안내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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