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60만 번의 트라이

혹시 2007년 개봉해 뜨거운 호응을 얻었던 김명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우리학교>를 기억하는지? 재일조선인에 대한 냉대와 차별이 심한 일본 땅에서 조선말과 글, 역사를 배우며 조선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는 조선학교 학생들의 해맑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영화. 아이들이 해맑으면 해맑을수록 꼭 그만큼, 그 아이들이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야하는 냉정한 현실에 가슴이 미어졌던 영화.

<우리학교>에서 보여주었던 재일조선학교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이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은 2014년, 다시 재일조선학교 아이들의 이야기로 ‘인간다움’의 온기를 전하는 영화가 우리 곁에 찾아온다. 9월에 개봉할 박사유ㆍ박돈사 감독의 다큐멘터리 <60만 번의 트라이>가 바로 그 영화다.

 
<60만 번의 트라이>의 주인공은 남한으로 치면 고등학생 또래의, 오사카조선고급학교의 덩치가 산만한 럭비부 학생들이다. 이들이 만드는 드라마는, 당연히 지루할 것이라 예상되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능오락프로그램처럼 경쾌하고 빵빵 터지는 웃음으로 가득하다. 이 재미는 카메라에 담긴 오사카조선고급학교 럭비부 학생들의 살아 있는 캐릭터로부터 나온다.

‘무한도전’ 같은 텔레비전 리얼 버라이어티의 출연자들이 국민MC, 2인자, 사기꾼, 미존개오, 땅꼬마 등 각각의 역할이 있듯, 15명의 럭비부 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맡은 캐릭터가 다 있다. 개그 담당, 감동 담당, 교훈 담당 등 각기 맡은 역할이 다르지만 그 캐릭터가 하나같이 다 매력적이다. 거기에 럭비부 감독 선생님과 매니저 소녀들, 럭비부원의 부모들까지, 어떻게 이렇게 개성 넘치고 매력적인 인물들이 모두 한 학교에 모여 있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그러나 영화 속 인물들의 매력이 크게 느껴지는 만큼, 꼭 그만큼, 현재 재일조선인이 처한 현실이 더욱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7년 전 <우리학교>도 그랬지만 재일조선인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눈물바람일 수밖에 없다.

디아스포라, 허락받지 못한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 피부색, 언어, 문화, 모든 것이 당연히 익숙한 공간에서 평생을 살아온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요즘 세상에 ‘촌스럽게’ 누가 민족을 이야기하겠는가마는, 오사카조선고급학교 십대 소년들의 입에서 나오는 눈물 젖은 ‘민족’ 이야기에 어느 누가 감히 토를 달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 친구들에게 민족은, 북조선도 대한민국도 아닌 조선이란 국적은 생존이고 삶인 것을….

일본의 극우 보수당인 자민당 출신 오사카부(한국으로 치면 광역단위) 부장의 비상식적이고 뻔뻔한 태도에 욱, 하다가도 한국의 정치라고 어디 저만큼 비상식적이지 않은가, 나처럼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라 아무런 불편함 없이 ‘우리’말을 사용하며 내가 경험한 ‘우리’ 문화를 ‘보편’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내국인들이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디아스포라를 대하는 태도 역시 일본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더불어 재일본조선인들이 삶으로 구현하고 있는 ‘노사이드(No Side) 정신’을 보며 분단된 나라에서 나고 자라 편 가르는 것이 마치 유전인자에 각인되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배버린 나의 비상식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수백 명의 죽음에도 ‘종북좌빨’이라는 낙인이 따라붙는 한국사회의 현재가 오버랩되며….

<60만 번의 트라이>는 관객들이 재일조선인들이 처한 험난한 현실에 구경꾼이 되어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는 것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내 안의 비상식성을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영화다. 어쩌면 나 같은 내국인은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지내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여드름 가득한 오사카조선고급학교 럭비부 소년들의 말간 얼굴이 벌써부터 그립다. 경기장 밖에서는 네 편 내 편 가르지 않는다는 럭비의 ‘노사이드 정신’을 삶으로 보여주는 재일조선인 3ㆍ4세들에게 진심을 담아 경의와 존경, 응원을 보낸다.

※디아스포라 : ‘흩어짐’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특정 인종(ethnic) 집단이 자의적이든지 타의적이든지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노사이드(No Side) : 럭비 경기가 종료된 상황을 말한다. 시합 중에 경쟁 상대였던 두 팀이 경기가 종료된 후에는 서로 편 가름 없이 친구가 된다는 의미로, 신사적인 플레이를 중시하는 럭비의 기본 정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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