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신승일 극단 ‘자투리’ 예술감독

‘자투리’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팔거나 쓰다가 남은) 천의 조각’이라고 쓰여 있다. 자기를 치장하거나 포장하기에 바쁜 이 시대에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단어를 이름으로 쓰고 있는 극단의 예술감독을 만났다. 부평구 십정2동에 위치한 아트홀 소풍의 상주단체로 활동하고 있는 극단 ‘자투리’의 신승일(47ㆍ사진)씨다.

직업으로 삼고 싶지 않았던 연극인으로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신 감독은 1987년 대학에 입학해 풍물패 활동을 했다. 1991년 ‘강경대 폭행치사사건’이 있던 해, 이 사건과 간접적으로 연루돼 수원구치소에서 3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당시 함께 복역한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을 벌인 것에 관심이 생겨 장기수 선생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고 싶었다. 출소 후 작품을 준비하다가 군대에 갔고, 제대할 즈음 장기수 선생들은 북으로 송환됐다. 신 감독은 기왕 이렇게 시작한 거 연극을 계속하자고 생각했다.

그가 중학교를 다닐 때 그의 아버지는 미국으로 갔다. 그 후 가족들이 한 명씩 이민을 가기 시작했다. 신 감독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95년에 미국으로 갔다. 하지만 나름의 인생 계획이 있었기에 간 지 보름 만에 돌아왔다. 그 이후로 3년간 미국과 한국을 오갔다. 그러다 집안에 문제가 생겨 1998년부터 7년가량 미국에 거주해야 했고, 그때 연극 공부를 본격적으로 했다.

“저주라면 저주지요. ‘좋아하는 일은 업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연극에 모든 감각을 집중해 살았지만 직업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어요”

직장인 연극

그는 1995년부터 3년간 미국을 오가며 ‘시민연극’에 비전을 뒀다. ‘시민연극’은 1990년대 후반, 생활연극과 직장인연극이라는 표현으로 회자됐다.

“자기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연극을 해야 한다고 봐요.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직장을 갖고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 연극을 하자는 거죠. 그래서 직장인연극단체협의회를 조직했습니다”

단순하게 직장에 다니는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을 하며 생활에 뿌리를 내린 예술을 하자는 거란다. 풍부한 아이디어로, 아마추어지만 삶의 얘기를 반듯한 연극으로 풀어내자는 취지였다.

협동조합인 배우공동체

▲ 신승일 극단 ‘자투리’ 예술감독
“2007년 남구 학산소극장의 감독을 제안 받고 인천으로 왔어요. 학산소극장은 연극인들 입장에서 아주 잘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좋은 극장이 방치돼있어 살려보겠다는 생각으로 활동했습니다. 마침 공연도 해야겠기에, 2009년에 공연을 준비하면서 배우들을 모았어요. 그게 ‘자투리’지요”

신 감독은 처음부터 극단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고 중세 유럽의 동업조합인 ‘길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연극인 길드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서울의 위성도시인 인천에서 연극을 하면서 부딪치는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길드보다는 협동조합 형식의 배우공동체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배우들이 ‘자투리’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위해 모인다는 의미가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불완전한 것들이 온전한 하나를 만드는 과정이 소중하다고 생각한 거죠”

‘자투리’는 2011년에 예비형 사회적 기업으로 신청했고 올해 6월에 사회적 기업으로 승인 받았다.

“공동체의 토대를 만들고 인천에서 연극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게 노력하는 중입니다. 실패도 많이 했어요. 예비 사회적 기업을 하면서 동지적 관점이 퇴색하기도 했지만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 받고 다시 개척하는 자세로 하고 있습니다. 지역 연극을 활성화하기 위해 함께 공부하고 교육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해보고 싶습니다. 지역 연극을 살려야 해요. 지금은 자기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상황이 아니죠. 구조를 만드는 게 필요하고, 그러려면 정치적이어야 합니다”

지역 연극의 중요성을 정치인들과 교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 신 감독은 서울과 연계성을 끊을 수 없지만, 지금은 서울에 종속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인천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서울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근거지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 대안으로 교육 사업을 고민하고 있다. 예를 들어, 중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연극작품 몇 개를 봐야 한다는 규정을 두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강제해야 300만 인구의 인천을 문화도시로 만들 수 있으며, 이것을 이루려면 전문화된 아카데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기존 학점은행제를 통해 예술가들에게 학사 또는 석사학위를 줄 수 있는 공연아카데미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느리게 살아가기, 연극으로 배우다

“사람들이 너무 바쁘게 살아가요. 살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아야 해서 사는 거 같아요. 우리는 ‘느리게 사는, 슬로우(slow)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자기를 돌이켜보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여가생활을 한다고 해도 급하게 시간 내서 영화를 보는 일이 많잖아요. 이런 삶이 건전한 삶은 아니라고 봐요”

그는 연극은 급박한 삶에 잠시 쉼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며, 연극을 보려면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저도 연극인이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냥 보기가 어렵습니다.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머리 아프다고 생각해요. 연극을 보게 하는 힘은 따로 있지요. 어떤 궁금한 것들에 대한 정보를 알면 관심이 생기는 것처럼 뭔가를 알아야 연극도 재밌습니다. 가령,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씬(scean)은 대사가 주옥같은데 번역을 제대로 안 하면 아름다움이 사라져요. 영어 원본의 아름다움을 알고 가면 그 장면이 기다려지죠. 이런 것처럼 연극을 보게 만들려면 교육해야 해요. 교육으로 예술의 힘을 배우고 예술로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거죠. 돈만 많이 벌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서 ‘어떻게 살면 삶이 아름다워질까?’를 고민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예술의 영역입니다. 고대국가에서도 그 국가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배워야하는 교육이 있듯이 한국 시민으로 살기 위해 이 정도는 배워야한다는 걸 의무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민자 삶 경험으로 ‘이중언어연극제’ 개최

‘자투리’는 작년부터 ‘이중언어연극제’를 열고 있다. 말 그대로 하나의 작품을 이중의 언어로 공연하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필리핀 작품인 ‘귀국상자’를 우리나라 팀은 우리말로, 초청된 필리핀 팀은 필리핀어(=따갈로그어)로 공연했다.

“우리나라 이민정책이 약간 왜곡된 부분이 있어요. 이민자에 대한 인식은 천박하면서도 정책은 앞서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시혜를 베풀 대상자로만 바라봐 복지의 문제로만 접근한다는 겁니다. 이중언어연극제는 언어중심 연극제지만, 공연중심이 아니라 언어권이 기본권이라는 걸 내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어권이란, 이민자가 자신을 변론해야하거나 문화생활을 즐길 때 자신이 태어나서 배운 말로 소통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데 기본권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는 기본권이 유보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이민자들을 다문화라는 개념으로 또 다른 차별을 하고, 그들에게 시혜적 차원에서 한국어 교습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신 감독이 이민자 문제에 이토록 관심이 많은 이유는 뭘까?
“제가 바로 이민자의 자식이죠. 2010년에 영주권을 포기하고 영구 귀국을 했어요. 아버지가 미국에 사신 지 30년이 됐고 한인 사이에서 존경받는 목사지만 여전히 주류사회에서 봤을 때 영어를 잘 못하는 가난한 이민자일 뿐입니다. 이민자 공동체는 어느 나라든 존재하지만 본국의 인식 부족과 차별로 힘든 삶을 이어가죠. 이민자로서, 연극인으로 살다보니 아이디어가 생겨 이중언어연극제를 만들었습니다”

신 감독은 인천이 이중언어연극제 개최에 가장 적합한 도시라고 강조했다.
“인천은 근대 연극이 시작된 도시이자 근대 이민이 시작된 도시잖아요. 제 상황과 도시의 조건이 딱 맞아떨어진 거죠. 제가 이 일을 해야할 사람인 거 같아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연습실에서는 이따금 괴성이 들려왔다. 8월 5일부터 9일까지 아트홀 소풍 무대에 올릴 연극 ‘반쪽 날개로 날아온 새’를 연습하고 있는 중이다. 이 연극은 일본군 강제 성노예 문제를 다뤘다. 9월 22일부터 28일까지는 2회 이중언어연극제를 연다.(문의ㆍ070-8267-8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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