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이 만난 사람] 배우 권해효

인천 남구 학산포럼 초청 강연 ‘내 가슴 속 조선학교’

▲ 배우 권해효
배우이자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몽당연필(이하 몽당연필)’ 대표인 권해효(50ㆍ사진)씨가 지난 21일 인천 남구에 있는 영화공간주안에서 열린 학산포럼에 초청돼 ‘내 가슴 속 조선학교’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학산포럼은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는 명제로, 남구에서 지역 의제와 문화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지난해 6월 창립했다. 매달 포럼을 열고 있는데, 이날 포럼은 11번째다.

권해효씨는 “초청해줘서 고맙다. 부산에서 촬영을 마치고 강연 준비가 부족해, 온다고 한 것을 후회했다. 그래도 올 수밖에 없었던 건 ‘조선학교’라는 네 글자가 있는 곳이면 꼭 가야한다는 마음이 있어서다”라며 “무엇을 알려드린다기보다 제가 느낀 것을 나누려고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권씨는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한국사회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전쟁 같은 일이라고 했다. 편견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다름’에 대한 존중이 없는 교육방식에 좌절하고 있을 때 힘이 됐던 것도 조선학교라고 했다.

‘곁다리’ 활동에서 몽당연필 공동대표로

권씨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와 북녘어린이영양빵공장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엔지오(NGO=비영리 조직)에서 ‘곁다리’로만 있다가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 대지진 이후 몽당연필을 결성, 가수 안치환ㆍ이지상씨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

“대지진 당시 국내에서 600억원을 모았지만, 정작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와 조선학교 상황은 아무도 몰랐다. 나중에 언론을 통해 조선학교의 피해를 알았지만 후원금을 전달할 방법을 몰라 직접 만든 게 몽당연필이다”

예술가 중심으로 모인 몽당연필은 문화공연을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몽당연필 콘서트를 2011년 4월 시작해 2012년 3월까지 일년 동안 매달 정해진 날짜에 했다. 또한 소풍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제주ㆍ진주ㆍ광주ㆍ인천 등 지역에서도 콘서트를 열어 모금액 3억여원을 조선학교에 전달했다.

‘대지는 흔들어도 웃으며 가자’ 지진으로 무너진 조선학교 교실 한 구석에 교사와 학생이 써 놓은 글귀라고 한다.

권씨는 “우리 몽당연필의 구호가 됐다. 살면서 어려운 일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그 글귀를 새긴다”고 했다. 더불어 “조선학교에 관심을 갖는 자신에게 의문을 가지고 쳐다보는 눈이 많다”며 그 이유를 말했다.

“1980년대 중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열기가 대학가에 가득했던 때,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는데, 대학생활이 재밌어 시위 현장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 운이 좋아 대학 3학년 때부터 대학로 연극무대에 섰고, 졸업과 동시에 영화도 찍어 순탄하게 ‘딴따라’ 세계에 입문한 터라, 배고픈 예술인의 실정도 잘 몰랐다”

그의 고민은 결혼 후 아이를 출산하면서 시작됐다. 한숨만 나오고 아이가 생겼단 말을 들었을 때부터 축복이 아니라 공포였다.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니 즐거웠는지 의문이 들었다. 상식적이지 않은 세상에서 어떻게 아이를 키울 것인지 고민하다가 서점에 달려가 이 책 저 책 읽으면서 조금씩 사회에 대한 눈을 떠갔다. 그때 내린 결론은 세상을 좋게 바꾸는 일에 밥숟가락이라도 얹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에 사는 우리 형제들

▲ 권해효씨가 학산포럼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으며 활짝 웃고 있다.
2002년 가을, 금강산에서 ‘6ㆍ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청년학생 통일대회’가 열렸다. 남쪽에서 400여명이 참석했고, 권씨는 그 행사에서 사회를 봤다. 3일간 남북해외 청년학생들이 토론과 축구를 하고 산에 오르며 ‘우리 세대에 통일을 이루겠다’는 꿈을 꿨다.

3일째 헤어지는 순간에 남북의 청년학생들은 울지 않았다. ‘조만간 다시 보자’는 희망찬 분위기였다. 그 순간, 바닥을 구르며 우는 청년학생들이 있었는데, 바로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이었다.

당시 멍하니 바라만 보기만 했던 권씨는 “한참 지나 그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 땅에서 태어나 자란 학생들이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선택으로 조선학교에 갔다. 그러나 그 순간 일본 사회에서 스스로 ‘마이너’가 된다”며 “매일 스스로 일본 사람인가 조선인인가를 되묻던 아이들이 우리말을 쓰는 남과 북의 형제들을 보면서 자기 정체성에 확신을 가진 3일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그게 조선학교와 첫 만남이었다. 2년 후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흥행하면서 권씨는 일본에 자주 초청됐다. 일본에 간 김에 금강산에서 만난 친구들이 보고 싶어 수소문해 뜨겁게 재회했다. 그것이 조선학교와 구체적 인연을 맺은 시작이었다.

‘조선적’이라는 이름으로 난민 취급

재일 조선학교의 역사는 68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해방 후에도 일본 땅에는 많은 동포들이 남았다. 그들은 1945년 첫 한글 교습소를 열었다. 자기 집 한 칸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야 하기에 자녀들에게 우리글을 가르쳐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해방 후 일본은 남아있는 조선인들을 달리 분류할 방법이 없어 옛 ‘조선’에서 온 사람들이라며 ‘조선적’이라했다.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이들을 무국적자인 난민으로 취급한다. 일본에서 세금을 내고 살지만 투표권이 없다.

1946년 첫 조선학교가 개교한 이래 유치원부터 대학 정규과정까지 스스로 교원을 양성하고 교육과정을 운영했다. 한때 500개교가 넘었지만 지금은 60여개만 남았다.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의 국적은 다양하다. 대한민국 국적자도 있고, 조선적으로 남아있는 학생도 있다. 일본으로 귀화한 학생도 있다. 온갖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조선적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은 ‘우리는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돌아가고 싶은 나라는 남북으로 허리가 잘린 나라가 아니라 그들이 떠나올 때처럼 하나였던 나라다. 조선학교는 그것을 꿈꾸고 기다리며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분단, 통일 위해 조선학교 기억해야

“조선학교를 볼 때마다 학교 교육은 어떠해야하는 것인지를 배운다. 학교란 경쟁하며 상대를 밟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돈보다는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믿음으로 서로 도와주며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배우는 곳이다. 조선학교 졸업생들은 ‘우리 학교가 내 고향이다’라고 말한다. 그 아이들을 기억하는 것이 통일에 다가가는 것이다”

권씨는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 문제의 근원은 분단이라고 말했다. 분단을 극복하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고 단언했다.

“얼마 후면 6ㆍ15공동선언 14주년이다. 통일이야기는 철 지난 드라마가 아니라, 여전히 중요한 일이다. 몽당연필은 조선학교를 뛰어넘어 동북아 평화시대를 만들어갈, 북을 조국이라 부르고 남을 고향이라 부르는 보배와 같은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일을 하고 있다. 후원으로 함께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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