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이 만난 사람] 남흥우 인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맘껏 외국 갈 수 있다고 해서 해양대학 입학

남흥우(63ㆍ사진) ‘인천항을 사랑하는 800모임(이하 인사800)’ 회장이 지난 3월 20일 인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인천경실련) 공동대표로 취임했다.

그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지금의 동인천역 북광장 근처인 동구 송현동에서 태어났다. 송림초등학교와 상인천중학교, 인천고등학교를 나온 뒤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했다.

남 대표는 “지금은 복개했는데 수문통이라고 하는 큰 하천이 있었다. 소형 어선이 드나들었던 시절이다. 동네 형들이 한국중공업(현 현대제철)에 출입하는 트럭에서 고철을 하역하며 돈을 벌었고, 원목 껍질을 가져다 말려서 땔감으로 사용하던 시절에 그곳에서 자랐다. 현재 신흥동 정석빌딩 자리가 바다였는데, 거기 가서 수영하곤 했다”고 말했다.

남 대표는 유년시절을 매우 가난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형님이 군에서 휴가 나오면 할머니가 머리카락을 잘라서 고기 사다가 고깃국 해주던 시절이었다. 50~60년대까지 그랬다. 지금이야 선박과 항만시설이 발전했지만, 그 때 월미도에 가서 통선장(=외항에 정박한 배에 접안하기 위해 사용하던 통선을 타던 곳)에서 놀 당시 화물선은 다 ‘땟마’였고, 일일이 인력으로 하역했다”

유년시절을 그렇게 바닷가에서 보낸 그는 1971년 한국해양대에 입학했다.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제한적일 때, 외국에 나가고 싶은 마음에, 해양대를 졸업하면 외항선을 타고 외국을 다닐 수 있다고 해서 진학했다.

해양대에 입학하면서부터 바다와 항만이 그의 삶이 됐고, 그 인연으로 인천항을 떠나 살 수 없는 사람이 됐다. 해양대는 입학과 동시에 모든 학생이 해군 알오티시(ROTC)가 된다. 1학년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고, 졸업할 때가 되면 반은 군 장교로 가고 반은 전역해서 외항선을 탄다. 그는 군에 가려고 했으나, 뜻대로 안 돼 외항선을 탔다.

1976년 기관사로 중앙상선에 입사한 뒤, 1981년 12월 퇴사할 때까지 해외 30여개 나라를 다니며 수출입 화물을 실어 날랐다.

남 대표는 “상선에 입사해 처음 배타고 갔던 곳이 뉴질랜드였다. 1976년으로 기억하는데, 실습 때 가본 호주 분위기와 전혀 달랐다. 호주는 백인우월주의가 강했는데, 뉴질랜드는 그런 게 없이 주민들이 평화로웠다”고 기억했다.

외항선을 타면 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배가 항만에 도착한 후 화물을 하역(=화물을 적재하거나 내리는 일)하거나 선적할 때 시간이 제법 걸린다. 또 배도 정비해야한다. 그 기간에 여행할 수 있는 것이다. 1982년 인도에서 화물을 싣고 쿠웨이트에서 하역한 게 마지막 승선 생활이라고 했다.

남 대표는 상선을 타면서 우리나라 경제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몸으로 체험했다. 원자재와 생필품이 부족했던 그때와 지금의 수출입 화물 종류와 양은 현저하게 다르다고 했다.

그는 “당시 기계ㆍ원단ㆍ원목ㆍ철재ㆍ양곡ㆍ비료를 수입했고, 수출이라고 하면 가발 정도였다. 지금은 철강ㆍ석유화학ㆍ기계를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고 말했다.

“인천사람 아닌가? 그러면 인천항을 키워야지”

▲ 남흥우 인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8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1974년 갑문을 갖춘 인천항이 탄생했다. 인천항으로 불린 내항은, 1974년 4부두(현재 컨테이너부두ㆍ한국지엠 KD센터 위치)가 준공됐고, 1982년 제7부두와 양곡 전용 싸이로 준공, 1985년 1부두와 8부두 준공, 1990년 5만톤급 갑문 증설, 1995년 제6부두 준공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인천 내항은 갑문 설치로 아시아 최대 정온수역이 됐다. 연중 수심이 일정해 자동차 등 고부가가치 화물의 안전한 하역이 가능해졌다. 내항이 설치되면서 인천 경제도 같이 성장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남 대표는 “70년대 인천항 기능이 벌크 수입 전문항이었다. 시멘트와 철재가 수입될 때 외항에 대기 선박만 80여척 있었다. 부평공단과 주안공단을 중심으로 경제가 성장하면서 항만에 체선ㆍ체하가 급증했다. 하지만 인천항의 시설은 이를 소화하지 못했다. 게다가 부산항에 배를 대면 수도권까지 연결하는 철도와 도로가 발달하지 않아서 물류경쟁이 안 됐다. 심지어 부산에서 물건을 싣고 오다가 도중에 빼앗기는 일도 있었다. 공장은 수도권에 집중돼있고, 경제성장 초기 납기일에 맞춰 정량을 공급하려면 큰 배가 인천항으로 와야 했다. 그렇게 ‘파나막스’ 배가 출입 가능한 갑문을 갖춘 내항이 탄생했고, 나라 경제 성장을 촉진했다”고 말했다.

국민소득이 늘어나면서 교역량은 더욱 증대됐다. 인천항과 인천 경제는 1985년 남동공단 가동, 1980년대 3저 호황, 1992년 한-중 수교 체결로 더욱 성장하기 시작했다.

현재 천경해운 상무이사를 맡고 있는 남 대표는 1982년 회사를 천경해운으로 옮긴 후 직접 배를 타고 나가는 게 아니라, 육지에서 상선 업무를 지휘했다. 날마다 인천항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인천과 인천항에 관심을 가졌다.

“부산항이든 광양항이든 어디든, 선사 입장에서는 화물이 많은 곳, 어떻게 보면 이득이 많은 항에 가면 된다. 나는 인천사람 아닌가? 그렇다면 인천항이 지닌 경제적 효과를 생각할 때 인천항에 배가 들어와야 한다. 인천항을 키워야한다는 마음을 가진 후 2001년 1월 한국선주협회 인천지구협의회 위원장을 맡았고, 그 때 처음 인천경실련과 인연을 맺었다”

인천대교 주경 간 폭 800m와 인천항

한국과 중국이 1992년 수교를 맺기 전, 인천과 중국을 오가는 해운항로는 ‘인천-톈진’ 항로(1991년 12월 개설)와 ‘인천-웨이하이’ 항로(1990년 9월 개설)가 고작이었다. 한-중 수교 이후 항로가 신설되기 시작하면서 인천항의 물동량도 크게 늘었다.

그러나 정기항로가 그냥 개설된 게 아니다. 한국과 중국은 1993년 1차 회담에서 카페리 항로 4개 신규 개설과 컨테이너 항로 6척 투입을 합의했다. 이후 인천에는 1995년 ‘인천-칭다오’ 카페리 항로가 개설됐고, 1996년 ‘인천-단동’ 카페리 항로가 개설돼 현재 카페리 항로는 10개 노선이다.

하지만 컨테이너 항로는 답보상태였다. 2003년까지만 해도 인천에 중국과의 정기 컨테이너 항로는 없었다. 그때도 한국선주협회 인천지구협의회 위원장이었던 남 대표는 2002년부터 인천 항만업계,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컨테이너 항로 개설운동을 벌이며 해양수산부에 항로 개설을 촉구했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인천에도 중국을 오가는 정기 컨테이너 항로가 일부 개설됐고, 이는 인천의 항만과 물류 산업을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이는 훗날 인천북항, 인천남항, 인천신항 건설이라는 정부 정책과제를 낳게 했다.

그러다 2004년 5월 인천대교 주경 간 폭 논란을 겪는다. 현재 인천대교는 주경 간 폭이 800m다. 하지만 당시 설계는 700m였다. 인천항에 입출항하는 모든 선박이 교행하려면 주경 간 폭을 확장해야했다.

당시 정부는 선박 길이가 150m, 1만톤 이상의 선박은 ‘일방통행’하라고 했다. 그러면 인천항은 고사될 게 뻔했다. 그래서 남 대표는 주경 간 폭 확장을 위한 ‘제2연륙교(현 인천대교)범시민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아 운동을 전개했다. 그렇게 인천대교의 주경 간 폭이 800m가 됐고, 10만톤 이하 선박의 교행이 가능해졌다.

“당시 용역을 한국해양수산연구원에서 맡았는데, 연구용역비가 8000만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10만원씩 800명이면 된다는 생각에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훗날 주경 간 폭 확장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모여 ‘인천항을 사랑하는 80인의 모임’이 탄생했다. 나중에 ‘인천항을 사랑하는 800모임’으로 변경했는데, 800명이라는 의미, 주경 간 폭 800m의 의미가 담겨있다”

인천과 인천항에 봉사하고자 인천경실련 대표 맡아

남 대표는, 인천항만업계가 한-중 항로 개설, 인천대교 주경 간 폭 확장, 내항 재개발 대책 등을 세울 때 인천경실련을 비롯한 인천지역 시민사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언젠가 그 빚을 갚아야한다는 생각에 인천경실련 공동대표를 맡았다고 했다.

“인천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항만을 활성화해야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여전히 인천항에는 과제가 많다. 아울러 인천경실련에 그동안에 졌던 빚도 갚아야할 때가 됐다. 인천 사람으로서 인천과 인천항에 마지막으로 봉사하겠다는 마음이 크다. 인천항만업계가 지역사회와 유대가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럴 때일수록 자리를 만들고, 함께해야 한다. 어쩌면 내가 시민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은 게, 그런 유대를 강화하는 시작일 수도 있지 않겠나? 인천항이 인천시민들에게 보다 열린 공간으로 인식되고, 인천항만업계 또한 인천시민들에게 열린 자세로 다가설 수 있게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나갈 계획이다”

남 대표는 끝으로 각오를 밝혔다. “인천에 살고 있는 사람, 인천에서 기업하는 사람, 각자가 자기 나름의 주장을 할 수 있게 하겠다. 인천에 살고 있는 인천시민과 인천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기업인이 풍요롭고 자부심을 지니고 살면서 나름대로 자기 몫의 주장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이를 위해 ‘이유 있는 약자’ 편에 서겠다. 이유 있는 약자 편에서 정책을 개발하고 대안을 모색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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