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만신

만신 │ 박찬경 감독 │ 2014년 개봉

 
시골 장터의 한 구석, 요란한 징소리가 들리고 과장 조금 보태어 구름떼 같은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다. 두렵지만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한 어린아이는 소리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알록달록 오방색 옷을 입은 여자가 방울을 흔들며 펄쩍펄쩍 뛰고 있었고, 음식을 잔뜩 차려놓은 상 앞에선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이 굽실거리며 빌고 있었다. 뚝, 하고 방울소리가 멈추나했더니, 춤추던 여자가 서슬 퍼런 작두 위에 올랐다. 어린아이는 무서워 눈을 꼭 감았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영화 이야기가 아니다. 내 어릴 적 기억의 한 조각이다. 몇 살 때인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그 소리와 춤추던 여자의 형형색색 저고리, 그리고 작두타기의 섬뜩한 인상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다. 엄마 뱃속부터 교회에 다녔던 집안 분위기상 무속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제사 구경도 못 해본 내게도 굿은 어린 시절 기억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무속은 우리네 삶의 일부였다.

그러나 무당과 굿은 어느 새인가 텔레비전 드라마, 그것도 시대극에서나 볼 수 있는 ‘특이한’ 어떤 것이 됐다. 무속은 예술의 한 분야로 존재해야할 문화재일 뿐, 현대사회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질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 과학에 대한 절대적 신봉 아래 몇몇 공식화된 종교만이 허용되는 현대사회에서도, 사람들이 정작 답답하고 막막해지면 찾는 곳이 점집이고 철학관이라는 것을. 그저 드러내지 않을 뿐임을.

영화 <만신>은 천대받는 무당에서 나라무당이자 인간문화재가 된 김금화를 통해, 바로 그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삶과 늘 함께 해온’ 무속의 영역에 카메라의 앵글을 맞춘다.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정책과 다름에 배타적인 한국 기독교의 위력은 무속을 미신의 영역으로 밀어냈지만, 영화로 만난 김금화의 삶은 인간세계와 무속의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질긴 인연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아들을 바라는 집안에 태어나 탯줄을 끊자마자 윗목에 엎어 뉘어지는 서러운 삶을 시작한 계집아이 넘세.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으려 어린나이에 시집이라고 간 곳에선 배를 곯으며 호된 시집살이를 견뎌야한 어린 새댁 넘세. 지옥 같던 시집을 탈출해 운명과도 같은 신내림, 그리고 금화라는 비단꽃 같은 이름을 가진 금화. 남진과 북진을 반복하던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내놓고 쓰러져 간 국군과 인민군의 원혼을 달래던 무당 금화. 광주민주화운동, 삼풍백화점 붕괴 등 한국현대사의 굽이굽이마다 죽음의 현장에서 넋을 위로하던 나라무당 금화.

무속인의 삶이란 숙명적으로 공적일 수밖에 없다. 김금화라는 한 개인의 삶이지만 그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곧 우리의 현대사를 따라가는 것이기도 하다. 개인의 한과 응어리를 풀어주는 만신 이야기로 푸는 현대사는 미시적인 삶의 편린을 놓치지 않는다.

김금화 본인이 출연하고 그의 삶을 담는다는 점에서 <만신>은 분명 다큐멘터리다. 그러나 김금화를 연기한 김새론, 유현경, 문소리는 다큐멘터리에 종종 쓰이는 ‘재연’ 배우에 머물지 않는다. 어린 넘세(김금화의 아명), 신내림을 받은 금화(류현경), 큰무당이 된 금화(문소리), 그리고 실제 인물인 김금화가 서로 독립된 캐릭터로 목소리를 낸다.

오히려 실제 김금화는 자신의 삶을 담담히 바라보는 관찰자처럼 보인다. 거기에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익숙한 성우 김상현의 내레이션까지 있다. 만신 김금화의 삶을 바라보는 다섯 개의 목소리가 공존하는 아주 독특한 형식의 드라마이자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만신은 사이, 경계의 존재다. 작두를 타듯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신과 인간 사이를 잇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응어리를 풀어낸다.

과학과 이성이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된 현대사회에서도 사람들이 여전히 점집과 철학관을 찾는 것은, 삶에서 잃어버린 사이와 경계를 찾기 위함이 아닐까? 그래서 날선 작두를 타듯 사이와 경계의 삶을 기꺼이 감당하며 개인의 아픔과 역사의 응어리를 풀어낸 만신 김금화의 삶이, 영화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치유라는 선물을 선사해주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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