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우아한 거짓말

우아한 거짓말 | 이한 감독 | 2014년 개봉

 
학교폭력, 왕따, 그로 인한 자살…. 귀가 닳도록 들어온 단골뉴스다. 그만큼 현실에 비일비재한 일이란 이야기다. 때문에 이미 영화로도 많이 다뤄졌다. 학교폭력을 다룬 영화의 거의 대부분은 피해자와 그 가족의 고통과 슬픔에 집중하면서 가해자에 대한 처절한 복수에 초점을 맞춘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사건, 그래서 피해자의 고통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가해자에 대한 복수가 명징할수록,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마련이다.

영화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가 폭력을 대하는 태도는 대부분 하나의 사건으로, 물리적 상해로 바라보는 것이다. 하기에 폭력에 대한 대응책은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를 처벌하고 물리적 상처를 치료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폭력은, 특히나 학교폭력이나 가정폭력처럼 일상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갑자기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물리적 상해보다는 심리적‧정서적 상해가 더 크고, 그 후유증도 더 깊을 때가 많다.

<우아한 거짓말>은 학교폭력과 그로 인한 자살을 모티브로 삼고는 있지만, 여느 영화와는 다르다. 자살한 피해자 천지가 있고, 피해자를 직접적으로 괴롭힌 가해자 화연도 있지만,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여느 영화처럼 뚜렷하지 않다.

천지의 가족과 친구들 모두 가해자이기도 하고 더불어 피해자이기도 하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을 넘어선 순간, 관객들은 폭력을 우발적 사건이 아닌 ‘일상의 관계’라는 렌즈로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학교폭력과 자살이라는 사건이 일상의 관계라는 렌즈를 통과하면서 억울함과 복수, 용서와 화해라는 빤하지만 불가능했던 이전의 구도는 완전히 와해된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성찰과 반성이다. 천지가 자살에 이른 것은 특정인의 폭력이라는 사건 때문이 아니었다. 숫기 없고 외로움을 많이 타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던 천지에게는 엄마와 언니 만지의 무관심도, 친구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들도 모두 폭력이었다.

외로웠고 위태로웠던 천지는 그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누구도 그 신호를 감지하지 못하고 흘려버렸다. 결국 천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야 그때 그 신호가 자신을 잡아달라던 천지의 ‘SOS’였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릴 뿐이다.

물론 가족이 무관심하다고 해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해서, 누구나 천지처럼 자살을 택하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영화 속 천지의 엄마나 언니 만지는 특별히 무관심하지도 살갑지도 않은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친구들 역시 대놓고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일진’들인 것도 아니다. 천지의 죽음은 천지의 약함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란 원래 약하다. 오롯이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은 타인의 인정과 지지, 보살핌 없이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왕왕 잊는다. 마치 홀로 살 수 있는 것처럼.

<우아한 거짓말>을 보는 내내 ‘노란봉투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노란봉투 프로젝트란 쌍용자동차와 철도노조 조합원 등 파업 이후 회사로부터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 노동자들을 돕는 모금운동이다.) 얼마 전 자살한 진보정당의 젊은 활동가도 떠올랐다. 물론 노동자들이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진보정당의 활동가가 자살한 것 역시 내가 뭘 어쩔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이런 사건들에 대한 분노는 자본과 권력을 향하는 게 옳다.

그러나 해고노동자들이 20명 넘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보면서도 외면해버렸던 비겁함을 뼈아프게 인정한다. 화연이나 미라를 비롯한 천지의 친구들처럼 무심코 비수와 같은 독설을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힘들다고, 나를 잡아달라고 보낸 신호를 무심결에 흘려버렸을 수도 있다. 천지의 엄마처럼, 언니 만지처럼.

천지가 보낸 구조신호를 누군가가 눈치 채고 그의 말을 들어주었더라면 천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내 주변에 천지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구조신호를 보내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귀를 열고 주위를 둘러보며 그 신호를 들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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