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간] 술과 노래, 이야기가 있는 곳 - 동인천 ‘그루브’

지난 10일,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봤다. 원래는 롯데시네마 부평점에서 오후 7시에 상영하는 게 있어 그걸 지인들과 함께 보기로 했다. 그런데 당일, 예매하러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그 시간에 하는 영화가 없어졌다. 동인천 애관극장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그 영화를 상영한다고 해 그 곳으로 갔다.

영화는 많은 얘기를 남겼다. 극 중, 윤미 아버지 상구(박철민 분)는 영화에서 묻는다. “멍게는 동물일까요? 식물일까요?”

답을 듣기 위해 묻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 같은 이 질문은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멍게는 원래 뇌를 갖고 있는 바다 속 동물이었는데 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뇌를 스스로 소화해버려 식물처럼 된다고 한다. 멍게 같이 ‘무뇌’인양 안주하며 살아가는 누군가를 향해 던진 무서운 대사였다.

영화를 보고나서 동인천에서 멍게를 파는 술집을 찾았다. 대여섯 군데를 찾아다녔지만 제철이 아니라 더 기다려야한다는 대답뿐이었다. 더 이상의 멍게 찾기를 포기하고 ‘착하게 생긴 사장님’이 마음에 들어 한 술집에 들어갔다. 멍게 대신 얇게 썰린 방어회를 먹었다.

방어회를 내온 사장은 다른 손님의 요청이 있었는지 주점 한 쪽에 마련돼 있는 무대에서 기타를 치며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를 불렀다. 제법 솜씨 좋은 노래를 들으며 막걸리 한잔을 들이켰다. 조만간 취재를 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13일, 저녁 장사를 준비하고 있는 노래와 음악이 있는 곳, ‘그루브’의 김동환(42) 사장을 다시 만나 그의 노래와 꿈, 가게와 안주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

 
가게 안을 찬찬히 살펴보니, 1층 무대뿐만 아니라 2층에 밴드가 공연할 수 있게 악기와 음향기기를 갖춰놓았다.

“예전에 ‘밴드데이’라고, 우리 가게에서 주최해서 아마추어 밴드를 모아서 공연 하고 놀기도 했어요. 소문 듣고 서울에서 오기도 했죠. 두 달에 한 번씩 했는데 8회 정도하다가 지금은 그만뒀습니다”

분명 장사가 목적은 아닌 듯했다. 어떤 사연으로 술집을 시작했을까.

“대학에서 노래 동아리 활동을 했어요. 졸업하고 스튜디오(음악 작업실)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음악 하는 직업이 워낙 어렵고 미래보장도 안 돼, 연안부두로 잡혀 와서 일하게 됐죠”

김 사장은 경상남도 진주가 고향이다. 그의 부모는 경남에서부터 수협 중매인을 했다. 집안이 수산물 계통의 일을 꾸준히 해왔던 것이다. 부모는 인천에서도 수산물 수입과 유통을 했는데, 친형이 그를 불러들였다.

“10년간 연안부두에서 일만 했는데 삶이 지겹더라고요. 내가 잘하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수산물 유통과 음악을 접목해보았죠”

5년 전 처음 이 가게를 냈을 때는 통기타 시스템을 갖추고 조개구이 ‘무한리필’을 했다. 당시 손님들이 줄서서 기다릴 정도로 장사진을 이뤘다고도 했다. 그러나 동인천의 술집들이 너무 싸게 팔아서 마진(margin=중간이윤)이 없고 인건비를 줄 정도가 안 돼 혼자 운영하다보니 쉽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가게가 음악 시설 면에 있어서는 어느 공연장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

▲ ‘그루브’의 김동환(42) 사장.
‘그루브’는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뀔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은 일반음식점으로 등록돼있어 손님들이 직접 마이크로 노래 부르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손님들의 요청으로 김 사장이 혼자 연주하고 노래하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손님들도 노래하고 싶어 하는데, 이럴 때 난감하다.

“손님이 노래할 수 있는 공간이 되려면 업종을 변경해야 해요. 건물 용도 변경과 소방시설 등을 갖추려면 큰돈이 들지만 그래도 손님들이 직접 노래 부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5년간 장사를 하면서 예술인들 사이에 입소문도 많이 났다.

“어제도 어떤 시인이 오셨는데 영감을 많이 얻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같이 대화하고 술 마시는 게 좋죠. 저는 예술인들을 사랑해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를 쉼터라고 표현하는데, 5년을 버텼지만 좀 힘이 드네요”

김 사장은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욕심은 없다고 했다. 인터뷰 전 날도 이곳을 배경으로 독립영화를 찍었는데 비용을 받지 않았고, 2층에서 연극을 하거나 밴드들이 공연할 때도 사용료를 받지 않는다.

“어차피 안주 값이 싸니까 뒤풀이를 하려면 우리 가게에서 해달라는 조건으로 빌려주죠. 저는 먹고 쓰는 정도만 있으면 돼요. 요즘은 통장이 마이너스라 그게 좀 힘들죠.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뭐. 사람이 좋은 게 다예요. 그래서 힘들어도 열심히 살자고 생각해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김 사장은 노래 동아리 중에서도 민중가요(民衆歌謠) 동아리에 들어갔다. 민중가요란 사회운동에서 불리는 노래를 총칭하는 말인데 주제별로 다양하다.

“서민들의 삶을 잔잔하게 노래하는 게 좋았어요. ‘천지인’이라는 그룹의 ‘청계천 8가’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가 정말 좋아서 청계천을 거닐다가 학교(성균관대) 꼭대기에 옥류정이라는 정자에서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어요.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곳인데 새벽에 도시들이 깨어나는 소리가 나요. 새벽시장에서 느껴지는 활기 같은 것 있잖아요”

김 사장은 감수성도 있고, 실력도 갖춘 듯했다. 고등학교 때 지역에서 열린 노래자랑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단다.

“엠비시(MBC) 서부경남지역 ‘별이 빛나는 밤’에서 1년에 한 번씩 경연대회를 하는데 고등학생 신분으로 참여했어요. 다 대학생들이었는데 제가 1등을 했죠. 부상으로 받은 게 설악산 관광 티켓인 걸로 기억해요. 그때부터 노래하는 게 로망이었어요”

그러나 그는 한동안 무대 위에서 노래할 수 없었다. 대학 동아리에서는 반주 실력이 있는 그를 보컬보다는 기타리스트로 만들었다. 노래에 대한 갈증이 계속됐다.

“우리 가게에 가수들이 오면 저에게 노래를 많이 시켜요. 기교는 없지만 진심을 담아 부르니까 좋아해주는가 봐요”

즐기고 싶은 사람, 모두 오세요

 
예전에 스튜디오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 중에 지금도 음악을 하는 사람인 김 사장이 ‘형’이라고 부르는 그 어떤이는 대한민국 대표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신대철씨와 작업을 하기도 한다. 김 사장은 자신도 그 일을 계속했으면 지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거라 말하기도 했다.

“후회는 안 해요. 지금도 만족해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자유롭게 지내면서 예술인들이나 음악인들한테 인정받을 때도 있으니까 좋아요”

김 사장은 가게를 확장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용도 변경이 안 되면 가게를 이전해서라도 음향 장비를 갖추는 데 1000만 원을 ‘내지를’ 생각이다. 가게 안쪽에 위치한 무대도 출입구 쪽으로 꺼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꿈이 있다.

“‘민중의 집’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여기가 그런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시민들한테 개방해 배움이 있고, 노래와 술과 예술이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민중의 집’(정경섭 저, 레디앙)은 저자가 스웨덴ㆍ스페인ㆍ이탈리아의 ‘민중의 집’을 45일간 방문한 후 쓴 기록이다. ‘민중의 집’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럽 전역에 생긴 풀뿌리 민중운동의 산물로 다양한 모임이 이뤄지는 만남의 장소이자 값싼 생필품을 교환하고 연극과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하는 곳이다.

제2의 고향, 인천에 대한 자부심

김 사장이 인천에 온 지 15년 됐으니, 인천은 그에게 제2의 고향이다.

“처음에 연안부두에서 일할 땐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일이 너무 힘드니까 인천 쪽으로는 소변도 안 본다고 했어요. 음악을 하더라도 인천에서는 안 할 거라고 했는데 이제는 인천을 벗어나는 게 힘들죠”

김 사장은 인천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 록 음악의 메카가 인천이라는 말은 음악인들 사이에 기본적으로 인식돼있다. 또한 다양한 분야에서 오래 활동한 예술가들이 많다.

5년 동안 장사하면서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았다고 한다.

“오십 세가 넘은 형님이 이런 공간이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고, 유지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라고요. 처음 기타를 배워 동호회 사람들하고 공연도 하니까 얼마나 행복했겠어요?”

재밌는 일도 있었다. ‘그루브’에서 세 쌍이 탄생했다. 그들을 위한 ‘프러포즈 이벤트’를 했는데 남자 손님하고 미리 각본을 짜 여자 친구가 2층의 밴드연습실 문을 열게 했다. 그때 김 사장의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지며 남자 손님이 여자 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사랑이 어찌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앞으로도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하면서 살고 싶어요. 여기 오신 분들이 행복해하면 더할 나위 없고요”

자유로운 영혼, 김동환 사장의 건승을 빈다. 그래야 많은 이들이 행복해질 것 같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