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별 그대? ‘별에서 온 그대’의 줄임말로 요즘 수목드라마 중 26%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다. 이 드라마는 인천에서 많은 분량을 촬영했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도 스토리상 중요한 녹화가 몇 차례 진행됐다. 인천시립박물관을 방문한 지난 1월 29일에도 촬영을 막 끝내고 분주히 정리하는 스텝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인천대에서 촬영했는데 그 곳엔 박물관이 없어서 우리에게 요청해 협조해주었어요. 주인공인 김수현과 전지현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인 ‘비녀’를 찍는 중요한 장면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이렇게 많이 나올지 몰랐죠. 지금까지 네다섯 번 촬영하고 갔어요”

요즘 시립박물관은 여러 가지 일로 바쁘다. ‘별 그대’ 촬영지로도 많은 이들이 몰리고 있지만, 그것보다 최근에 끝낸 ‘안녕하세요, 배다리’ 전시로 많은 시민들이 이곳을 찾았다. 지난해 12월 3일부터 올해 2월 2일까지의 전시가 끝난 뒤 이 전시를 기획한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을 만났다.

“인천에서 배다리는 특수성이 있는 곳이죠. 기성세대인 40~60대에게는 어릴 때 뛰놀고 헌책방 다니던 추억의 공간이죠. 1995년 이후 배다리에 개발이 진행되면서 찬성과 반대쪽으로 주민들이 첨예하게 나눠졌어요. 보존 쪽으로 가닥이 잡히고 문화예술인들이 어우러지면서 역사문화마을 만들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어요. 이런 것들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이번 전시회에 많은 시민들이 보러오고 전국의 언론이 주목한 이유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개발에 찬성, 반대하는 쪽이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느꼈어요. 그런 상황을 객관적으로 시민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30년째 배다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개발 찬성 주민과 인터뷰를 했는데, ‘건물을 살 당시는 경기가 좋아서 잘될 줄 알았지만 지금은 인구가 줄고 상권도 붕괴돼 살기가 힘들어졌다. 개발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 분 말씀은, 누가 집만 고쳐준다면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해요. 이 마을이 얼마나 살기에 좋은지는 알지만 너무 힘들어서 현실적인 방법을 찾다보니 개발에 찬성하게 된 거죠”

배 부장은 이번 전시로 과연 개발이 나쁜 것인지, 맹목적인 개발의 문제와 역사와 문화를 지키는 새로운 개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분명한 것은 배다리는 지금 그다지 안녕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 메시지를 지역사회에 던지고 싶었습니다”

사라질 위기의 100년 역사를 지켜내는 사람들

▲ '안녕하세요 배다리' 전시회의 모습.
배다리는 배가 닿는 곳이라는 뜻이다. 1883년 개항 이후 개항장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이 지금의 동구 금창동과 송림동, 중구 경동에 마을을 형성했다. 배다리가 가난한 조선인들의 공간으로 자리 잡자 자연스럽게 조선인을 위한 학교가 들어서고 장터가 형성됐다. 배다리는 우리나라 서구식 교육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당이 1892년 설립됐고, 1907년에는 민족자본으로 세운 공립보통학교 창영초교가 생겼다. 1917년 국내 최초의 성냥공장인 ‘조선인촌’과 막걸리를 제조하던 ‘인천양조장’ 등도 여기에 둥지를 틀었다. 100년이 넘는 문화유산이 고스란히 숨 쉬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인천시가 이 마을을 관통해 송도와 청라를 연결하는 폭 50m의 산업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2007년 철거를 시작했다. 또한 수년째 지지부진하게 논의되고 있는 동인천역 북광장 재정비촉진지구에 배다리 헌책방 일부지역이 포함되자 주민들이 개발 반대운동을 벌였다. 인천시에서는 2013년에 ‘존치관리지구’로 변경해 당장 개발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인천항 개항 이후 100년 이상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배다리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지역 주민과 시민단체ㆍ문화예술인ㆍ종교인들이 나섰다. 이들은 주민들과 마을축제를 열고 크고 작은 문화행사를 이어가며 배다리를 지키고 있다.

살아 있는 박물관 위해 시민들과 소통

“피상적이고 큰 주제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배다리 전시회는 2011년에 기획했지만 예산문제로 미뤄지다가 이제야 한 거죠. 배다리를 선택한 것은, 주민들이나 배다리의 분위기가 행복하지도 안녕하지도 못한 모습이어서, 앞으로 어떤 배다리를 원하는지 주민들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장을 열어보자는 의도였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겠다는 말에 관심이 갔다. 앞으로의 계획도 물었다.

“올해 4월부터는 ‘월미도’전을 열 생각입니다. 인천시민이나 외지인들이 인천을 생각하면 낭만과 유희의 장소로 월미도를 떠올리는데, 사실 이면을 보면 아픔이 많은 동네예요. 그런 상반된 이미지를 드러내놓고 보여주자는 계획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박물관으로 이어졌다.

“얼마나 박물관이 죽어있는 공간이었으면 ‘박물관은 살아있다’라는 영화 제목이 나왔겠어요(웃음). 원제는 박물관에서의 하룻밤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살아있다고 번역한 거죠”

그는 박물관은 교육의 공간이자 문화의 공간, 서비스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박물관이 살아있기 위한 구체적인 고민이 궁금해졌다.

“박물관 본래의 기능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어요. 다양한 장르를 융합해 콘텐츠를 개발해야죠. 최근 건물을 리모델링하면서 음악공연도 하고 여러 문화행사를 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전시도 다큐나 만화, 연극, 영화처럼 하나의 매체라고 생각해요. 전시라는 매체로 하고 싶은 말을 던지고 시민들의 반응을 확인해 다시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21세기의 박물관이 아닐까요”

시립박물관은 연수구 옥련동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청량산 옆에 위치해있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지만 도심으로부터 벗어나있어 시민들의 접근성이 많이 떨어진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박물관이다.

“그게 고민이죠. 하지만 좋은 위치에 자리 잡았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살아남아 시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거죠. 위치와 확장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여건이 좋지 않아 답보상태입니다”

제2의 고향 인천에서, 인천의 가치를 찾다

▲ 한 시민이 ‘안녕하세요, 배다리’ 전시물들을 살펴보고 있다.
배 부장은 1996년 연구직 공무원으로 박물관에 들어온 뒤 3년간을 방황했다.

“유학을 준비하면서 학비 마련을 위해 취직한 거라 처음엔 혼란스러웠어요. 방황의 시기를 거치면서 나름 박물관에 대한 철학이 생기더라고요. 공부가 개인의 성취라면 이 일은 개인의 성취도 있겠지만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 뒤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인천사람도 아닌데 인천에 대해 많이 안다’는 얘기를 지인들로부터 자주 들었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987년 인하대 사학과에 입학하면서 인천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인천 토박이였으면 이렇게 많이 알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외지인에게 보이는 것들이 토박이들에게는 익숙해서 안 보이잖아요”

인천에 와서 제일 궁금했던 것은 ‘동인천’이었다. 대학시절 동인천의 대한서림, 술집, 카페 등을 주로 다녔는데, 서쪽에 위치한 곳을 ‘동인천’이라고 부르는 게 이해가 안 갔다.

동인천역은 일제시대에는 ‘축현역’으로 불리다가 ‘상인천역’으로 변경됐다. 그 이유로 인천역 주변을 지금도 하인천이라고 부른다. 해방된 이후 다시 ‘축현역’으로 불리다가 1956년 ‘동인천역’으로 변경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인천역의 동쪽에 위치해 ‘동인천역’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되고 그런 만큼 보람을 느끼지 않을까? 언제 보람을 느꼈냐는 질문에, 그는 무척 많았다고 했다.

“행사를 준비하려면 며칠 밤을 새면서 고생을 많이 하는데 평가가 좋게 나올 때 정말 보람 있죠. 어떤 방문객이 관람후기를 홈페이지에 썼는데, 그게 아직도 기억나요. ‘인천인으로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전시였습니다’라는 내용이었죠. 이번 배다리 전시회 개막식 때 아벨서점 사장님께 인사말을 부탁드렸더니, 울컥하시더라고요. ‘배다리 사람으로서 자랑스럽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그는 ‘박물관이 죽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사회와 이렇게 소통하는구나’를 배웠고, 사회에 문제제기하고 화두를 던지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에게 박물관 일이 보람만 있는 건 아니다. 그는 한국박물관협회 홈페이지에 ‘대한민국에서 공립박물관 학예사로 살아가기’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첫 출근 날, “공무원은 문서로 말한다”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필자는 비로소 학예사가 아닌 공무원이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공서적보다는 행정처리 실무지침을 끼고 살아야하는 상황, 이것이 공립박물관 학예사들의 현실이다. 학창시절 꿈꾸었던 당당하고 창의적인 학예사의 모습 대신 어느새 ‘복지부동’ ‘젖은 낙엽’ 등의 단어가 어울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상황, 이 또한 공립박물관 학예사들의 서글픈 실상이다’

일을 하면서 힘들지는 않지만, 창의력을 필요로 직업에 폐쇄적이고 딱딱한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 조건과 상황 때문에 가끔 회의를 느끼기도 한단다.

소통 노력, 인천시민의 관심으로 화답해야

박물관은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하지만 일방통행이면 가능하지 않다. 시민들의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인천이 문화적으로 낙후됐다, 열악하다고 얘기하는데 모두 서울로 가면 인천이 언제 커지겠어요? 인천이 실제 가치보다는 낮게 평가되는 게 있어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관심을 줘야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부터 국립박물관 무료화를 실시했다. 문화 복지 차원에서 국민들에게 문화재와 역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2012년부터 다시 유료화로 전환하는 박물관이 늘었지만, 인천시립박물관은 올해 1월부터 무료화를 선언했다.

“개인적으로는 반대합니다. 이것도 상품인데 적합한 가격은 지불해야한다고 봐요. 정부가 잘못한 게, 국립중앙박물관을 무료화하면서 그 피해가 사립박물관으로 간다는 거예요. 수요층에 맞게 적정한 상품을 개발해야하고 거기에 적합한 관람료를 부과해야죠. 극장에 가서 만원 내고 관람하는 것처럼, 박물관에서도 두 시간은 충분히 즐길 수 있어요. 전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노력에 대한 대가는 있어야한다고 봅니다”

‘문화유산이 잘 갖춰진 나라일수록 입장료 적정화가 이뤄지고, 외국에서는 문화재 관람이 유료화인데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는 무료로 관람해 형평성에 맞지 않다’는 기사 내용이 떠올랐다.

문화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한 사회의 개인이나 집단이 쌓아온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산물이 아닐까? 우리의 정신적, 물질적 수준을 높여내기 위해 던져진 화두에 응답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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