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혜진의 사소한 과학이야기 78. 연탄(2)

 
최근 한 모임에서 만난 이가 내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그는 얼마 전 20여 년 동안 살던 아파트에서 단독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사연인 즉, 이사간 집에서 연탄보일러를 사용하는데, 연탄이 예전에 비해 훨씬 작아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빨리 타고, 더 자주 갈아줘야한다고 불평을 했다. 연탄을 생산하는 이들이 서민들을 속이는 것 같으니 한번 조사를 해보라는 것이다.

워낙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 통에 그 자리에선 그냥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은 빙긋 웃음이 났다. 투박한 생김새 때문인지, 그는 연탄을 쉽게 ‘뚝딱’ 만들어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연탄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마음대로 모양을 바꿔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연탄은 추운 겨울 많은 가정의 난방을 책임지는 엄연한 난방연료로서 한국산업표준규격(KS, 이하 산업표준)에 맞게 생산하게 돼있다. 산업표준에서는 연탄의 크기와 무게를 1호부터 5호까지 다섯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또 발열량(1kg 당 4500kcal 이상) 기준과 30cm 높이에서 떨어뜨렸을 때 부서지지 않아야한다는 점도 분명히 해두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연탄은 그 중 2호로 지름 158mm, 높이 152mm, 무게 4.5kg이다.

그런데 규정에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연탄 구멍의 개수이다. 연탄은 구멍이 뚫린 독특한 생김 때문에 ‘구멍탄’이라 부른다. 산업표준에서도 연탄이라는 말 대신 구멍탄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연탄은 구멍 수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르는데 1970년대 이전 가정에서는 구멍이 19개인 십구구멍탄을 사용했다.

연탄을 흔히 ‘구공탄’이라고도 부르는데, 십구구멍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이름이 길고 어감이 좋지 않아 ‘십’을 빼고, ‘구멍’을 한자 ‘공(孔)’으로 바꿔 ‘구공탄(九孔炭)’으로 줄여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구공탄이라면 구멍이 아홉 개여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구멍 아홉 개인 연탄은 생산된 적이 없다는 점도 이 설을 뒷받침한다. 현재는 가정에서 구멍 22개나 25개인 연탄을 주로 사용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연탄에 구멍이 뚫려 있는 이유는 연탄집개로 집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구멍이 없다면 어떻게 연탄을 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평소 농담하기를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우리를 놀리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보일러 기술자였던 아버지가 그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연탄에 구멍이 뚫려 있는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연탄의 화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다. 구멍으로 산소가 드나들면서 연탄 전체에 골고루 불이 붙어 강한 불꽃과 높은 온도의 열기를 발산한다. 연탄을 만드는 기술력이 늘어남과 동시에 구멍의 개수도 많아졌는데, 그 이유는 연탄을 난방만이 아니라 음식을 만드는 취사용으로도 사용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멍이 있어 조금 수월해졌을지는 몰라도, 연탄집개로 연탄을 집는 일은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자칫 세게 쥐면 연탄이 깨져버리고, 그렇다고 약하게 쥐면 옮기는 도중에 떨어져 박살이 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관건은 힘 조절이다. 연탄은 그야말로 떨어질까 다칠까, 애지중지 귀하게 다뤄야 하는 까다로운 것이었다. 연탄아궁이가 있는 집에서 살아본 이들이라면, 저마다 연탄과 관련한 일화들이 적어도 한두 가지씩은 있을 것이다.

내게도 ‘연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차가운 새벽녘, 방문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아직 해가 뜨기엔 한참 이른 시간이다. 아궁이 뚜껑이 열리고 하얀 연탄재가 나오고 빈자리에 새 연탄이 들어간다.

이불 속에서 눈을 감고 있지만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연탄불을 갈기 위해 달콤한 새벽잠을 끊고 몸을 일으킨 엄마의 움직임을. 그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편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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