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내렸다 하면 다음 날 기온이 뚝뚝 떨어진다. 금방 겨울이 오려나보다. 같은 비라도 계절마다 느낌이 다른 것이 참 신기하다. 생명을 움트게 하는 봄비, 무더위를 식혀주는 한여름의 소나기, 나뭇잎을 떨어트리고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 그리고 추운 계절에 마음까지 쓸쓸하게 하는 차가운 겨울비.

지금이야 구름이 비가 되고 바다로 흘러들었다가 다시 증발해 구름이 되는 물의 순환을 알고 있지만, 한자가 만들어지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옛 사람들은 하늘과 바람, 구름, 비, 해, 달, 바다 등 주변의 사물과 현상에 신(神)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원래 구름을 나타낸 한자는 云(이르다 운)이었다. 云은 구름 기운이 감도는 아래에 용이 꼬리를 말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한자 백 가지 이야기 | 시라카와 시즈카) 구름 속에 신성한 용이 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병풍이나 도자기 등 옛 물건에 그려진 용 역시 대부분 구름과 함께이다.

구름 속의 용은 불시에 세찬 비를 뿌리고 번개를 때려 세상을 호령하다가도, 어떤 날엔 말끔히 물러가 맑게 갠 하늘을 선사한다. 자신의 모습은 구름 뒤에 감추고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는 용의 모습을 통해 당시 왕을 비롯한 권력자와 백성 사이의 수직구조를 엿볼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신화에는 당시 사회의 권력 구조와 질서가 담겨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백성들의 복종을 얻어내기 위해 실체는 있어야 하되, 권위를 위해선 그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된다. 백성들은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비를 원망하고 때론 오지 않는 비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이런 신성한 힘을 가진 존재를 두려워했다. 자신들의 운명을 손에 쥔 용(=왕)의 뜻을 백성들은 알 길이 없으니, 용에 대한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云은 구름이라는 본래 뜻보다, ‘이르다, 말하다’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운운하다’라고 할 때 쓰이는 한자가 바로 云이다. 그러자 구름을 나타내는 새로운 글자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雨(비 우)와 云을 결합한 雲(구름 운)을 만들었다. 구름은 비를 내리게 마련이니 뜻을 전달하는 데 손색없는 글자다.

雨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모습을 그대로 그려 놓은 것이다. 맨 위의 가로획은 하늘을, 그리고 그 아래 디귿자를 돌려놓은 듯한 冂는 구역을 나타낸다. 문명사회 이래로, 지구 전체에 한꺼번에 비가 내린 적은 아직까진 없었다. 冂 안에 찍힌 점은 빗방울을 나타낸다. 雨처럼 현실감 있는 한자만 있다면 한자 공부가 얼마나 쉽고 재미있을까!

그나저나 지금 지구 한 쪽에 비와 바람이 큰 재앙을 몰고 왔다. 섬 7000여 개로 이뤄진 필리핀에서 말이다. 누군가가 “날도 추운데 웬 태풍일까” 하는 말을 들었다. 적도 부근에 있는 필리핀은 일 년 내내 무더운 날씨라는 걸 잠시 잊고 한 소리일 테지만, 나 역시 남의 일 보듯 하기가 영 꺼림칙하다.

기후학자들은, 앞으로 여름은 더 덥고 겨울은 더 추워질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재앙은 앞으로 얼마든지 우리를 또 덮칠 수 있다. 화가 난 용이 내린 재앙이 아닌, 지구를 돌보지 않아 생긴 인재라는 걸 지금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함께 잘 살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야한다. 우선, 어떻게든 사람 목숨부터 살려 놓고 난 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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