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이 만난 사람] 유범상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사단법인 마중물 이사)

‘2013 인천시민인문축제’가 10월 29일부터 11월 2일까지 닷새 동안 인천시청 앞에 있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인천지역대학에서 열린다.

방통대 인천지역대학과 남동구지역사회복지협의체, 사단법인 마중물이 함께 주관하는 행사인데, 방통대 인천지역대학에서 시민 행사에 공간을 내 준 것도 그렇고, ‘이제 힐링(healing)에서 필링(peeling)으로’라는 인문축제 주제도 생소하다. 성찰을 통한 몸이나 마음의 ‘치유’라는 뜻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나 감각을 통한 느낌이라는 필링(feeling)도 아니고 ‘필링(peeling: 껍질 벗기기)’이라니, 도대체 무얼 하자는 걸까?

궁금증을 안고 지난 11일 밤, 남동구 만수동에 있는 (사)마중물에서 유범상(사진) 방통대 행정학과 교수를 만났다. 그는 (사)마중물의 이사로 활동하기도 한다. 3년 전 ‘좋은 아빠 되기 강좌’에서 그의 강의를 들었고, 그가 <인천투데이>의 전신인 부평신문에 몇 차례 칼럼을 써 준 적이 있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국연구재단 공모 사업에 선정

▲ 유범상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먼저, ‘2013 인천시민인문축제’를 어떻게 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유 교수의 설명은 이랬다. 한국연구재단이라는 준정부기관이 있다. 학술이나 연구개발 활동과 관련한 인력 양성과 활용을 보다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수행하기 위해 만든 기관인데, 기존 한국과학재단ㆍ한국학술진흥재단ㆍ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을 하나로 통합해 2009년 6월 설립했다.

이 기관에서 매해 시민인문강좌 지원 사업을 공모하는데, 거기에 신청해 선정된 거다. 보통 컨소시엄 형태로 과제를 수행하는데, 한국연구재단에서 3000만원을 지원하고 방통대 인천지역대학과 남동구지역사회복지협의체에서 대응자금으로 1200만을 보탰다. 한국연구재단의 이 사업 지원은 내년에 한 번 더 이뤄진다.

유 교수가 한국연구재단의 공모에 제출한 연구과제(=사업)는 ‘이상이 일상이 되도록 상상하라: 시민인문강좌를 통한 질문, 성찰, 그리고 소통’이다. 앞서 언급한 인문축제의 주제처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 교수의 장황한 설명을 듣는 게 필요했다.

왜, 필링(peeling)의 인문학인가

“말을 타고 질주하다 지친 인디언이 갑자기 멈춰 섭니다. 너무 빨리 달려와서 자신의 영혼이 쫓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왜 내가 이렇게 힘들게 달리고 있는지, 내가 지금 방향을 잘 잡았는지, 이대로 계속 가도 되는 건지’ 그가 기다린 ‘영혼’은 성찰을 의미합니다. 성찰은 쉬면서 자신을 돌보고 충전하는 것(=힐링)입니다.

음악이 주는 평온과 소설의 상상력, 역사와 철학의 새로운 지식이 성찰을 매개합니다. 이 때 인문학은 지친 현대인의 쉼과 성찰의 안식처입니다. 인문학이 ‘인문치료’로 불리는 까닭이죠. 그런데 말의 질주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또 다른 성찰이 필요합니다. 말과 같은 초식동물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피는 습성이 있어, 눈가리개가 없다면 한 방향으로 질주하지 않습니다.

특히 경쟁의 승자가 되기 위해 채찍이 말의 엉덩이로 쉴 새 없이 오갑니다. 말을 멈춰 세우고 내 영혼이 오길 기다려서 위로하기보다, 누가 나를 이렇게 빨리 달려오게 했는지, 이렇게 달리는 것이 누구의 이득이었는지를 물어야합니다. 다시 말해 눈가리개를 씌운 자, 채찍으로 쉴 새 없이 나를 몰아세운 자가 누군지를 찾아내야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정신없이 달리다 지친 내가 아니라, 나를 지치게 한 ‘권력’인 것입니다. 이렇듯 인문학의 성찰은 두 개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미처 따라오지 못한 개인의 영혼을 돌보는 인문학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말의 눈가리개와 채찍에 초점을 맞춘 권력비판의 인문학입니다. 전자가 힐링의 인문학이라면 후자는 필링(peeling)의 인문학이라 할 수 있죠. 힐링이 지친 나를 위로하는 것이라면, 필링은 나를 지치게 한 권력관계와 구조를 문제 삼아 이것을 비판하고 바꾸려하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비판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세우고, 그것이 ‘현실’이 되게 정책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상상’과 ‘실천’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을 ‘인천시민인문축제’에서 시민들과 함께 해보려는 거죠”

‘필링(peeling)의 인문학’이라는 이상한 놈

유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을 했다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지금껏 힐링의 인문학을 했다고 말했다. 그의 장황한 이야기는 또 이어졌다. 영화 ‘설국열차’를 빗대서.

“인간이 만든 재앙으로 인해 지구가 설국이 됐는데,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은 끊임없이 달리는 설국열차뿐이란 말입니다. 지구에 누가 살아남았냐면, 앞쪽 칸에는 윌포드, 꼬리 칸에는 커티스가 있습니다. 커티스는 혁명을 꿈꾸고, 윌포드는 현 질서를 유지하려고 해요. 상대편에겐 서로 나쁜 놈이죠. 그런데 자기 지지자들에겐 좋은 놈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놈이 하나 나타나요. 송광호죠. 송광호는 양쪽에 붙는 데 관심이 없고 밖으로 나가려고 해요. 그러니 이상한 놈이라고 하죠. 그러니까 나쁜 놈, 좋은 놈, 이상한 놈이 존재하는 겁니다. 인문학은 인간과 공동체를 문제 삼는데, 그러면 인문학이 나쁜 놈일까, 좋은 놈일까? 아니면 이상한 놈일까요?”

앞에 들은 이야기가 있어, ‘이상한 놈이어야 한다’고 답할까 하다가 침묵으로 그의 이야기를 더 기다렸다.

“2006년, 전국 대학 80개의 인문대 학장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선언했단 말입니다. 2007년도엔 서울 주요 대학 7곳에서 교양 강의 158개가 폐강했는데, 그중 70%가 인문사회계열 강의였어요. 진짜 인문학의 위기였죠. 이 때 번역돼 나온 것이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입니다. 이 ‘희망의 인문학’이 현대인의 문제와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해줄 메시아로 떠올랐는데, 최근에 오창은 교수의 ‘절망의 인문학’이 출간됐어요.

인문학의 현장보고서인데, 봤더니 인문학이 굉장히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왜 절망의 인문학이냐. 지금의 인문학은 전부 윌포드의 인문학이라는 겁니다. 윌포드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읽어주고 저항하지 말고 있으라 하는 겁니다. 교양은 가르쳐주고, 저항은 가르쳐주지 않는 거죠. 국가나 권력비판은 안 가르쳐준다는 겁니다.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을 해야 한다고 해 인문학이 열풍이거든요.

그런데 스티브 잡스는 최고기술의 영감을 얻기 위해 인문학을 이용한 겁니다. 전 시이오(CEO) 인문학이 계급문제나 노사갈등문제 해결에 관심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어요. 도서관 인문학의 주요 참여자는 중산층이고, 도서관은 고급 교양과 사교의 장이 됐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윌포드의 ‘노숙자 인문학’은 빈곤과 실업의 구조적 원인을 다루기보다는 개인적 힐링에 초점을 맞춥니다. 인문학은 현실에 천착해있지만, 어떤 편에 서서 통치나 저항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등에(=쇠파리)처럼 일체의 권력을 문제 삼아 새로운 상상을 하는 통로이자 통로를 만드는 산파입니다. 즉, 인문학은 나와 내가 사는 공동체를 문제 삼아 당연하다고 하는 상식, 지식, 질서, 진리, 권력을 벗겨내어 그 이면을 문제 삼는 거죠. 우리사회가 가능한 빨리 ‘필링(peeling)의 인문학’이라는 이상한 놈과 전면적으로 대면했으면 좋겠습니다”

‘질문~성찰~소통~상상’으로 이어지는 인문축제

▲ 유범상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이제, 그가 말하는 ‘필링(peeling)의 인문학’을 인천시민인문축제에 어떻게 녹여내려고 하는지 들어볼 시간이다.

닷새 동안 날마다 오후 6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진행될 예정인 인문축제는 ‘질문~성찰~소통~상상’으로 이어진다. 첫날은 유 교수가 직접 주제 강연을 한다. 주제는 그가 앞서 이야기한 ‘힐링에서 필링으로’이다. 둘째 날은 성찰의 시간으로 ‘나, 지역, 그리고 세상을 바꾼 만남’을 서로 이야기한다. 그 ‘만남’은 책이 될 수도 있고, 영화나 여행, 사람이나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사전 공모를 통해 선정한 ‘만남’들을 명사와 함께하는 토크콘서트로 나눈다.

셋째와 넷째 날은 ‘소통’이다. 각각 영화와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자는 취지를 담았다. 교육문제와 관련한 영화 ‘대필’을 강당에 모여 함께 본 뒤 10명씩 강의실로 흩어져 토론한 후 다시 강당에 모여 토론한 내용을 발표하는 식이다. 책은 인종차별문제를 다룬 ‘푸른 눈 갈색 눈’을 선정했다.

마지막 날엔 ‘당당하고 풍요로운 공동체’를 상상한다. 사전에 공모한 청소년(24세 미만) 제작 단편영화 10편 정도를 상영하고, 선후배 시민이 어우러지는 축하공연이 펼쳐진다. 축하공연은 마지막 날뿐 아니라 날마다 준비돼있다. 아울러 책과 영화 관련 기관이나 동아리 홍보마당을 상설 운영한다.

유 교수는 “교육 관련 비판적 영화와 인종차별문제를 다룬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지역에 있는 책이나 영화 관련 기관이나 모임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지역사회에서 소통하는 게 이번 인문축제의 목적”이라며 “인천의 인문축제로 자리 매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덧붙여 “(사)마중물은 비판할 줄 아는 시민, 사회에 참여하는 시민을 만드는 산파 역할을 하고자 한다. 장기적으로는 ‘시민대학’을 만드는 게 꿈이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마중물이라는 이름으로 세미나ㆍ정책포럼ㆍ책읽기ㆍ이슈잡기ㆍ시민교육전문가 아카데미ㆍ정책전문가 아카데미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나중에 ‘시민대학’에 들어갈 프로그램을 시험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프로그램을 그동안 (사)마중물 안에서 했다면, 이번 인문축제는 밖으로 나가기 시작함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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