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이 만난 사람] 신민자 동구선배시민모임 ‘울타리’ 총무

민선5기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취임하면서 인천에선 주민참여예산제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기초지자체마다 지역에 관심이 상대적으로 많은 주민들의 참여로 조직을 만들고, 동네 주민총회를 열어 예산 배정 우선 정책과 사업을 선정하는 등, 지자체마다 방식은 다르지만 다양한 활동을 벌여 나름 성과도 냈다.

동구는 노령인구가 많은 지역 특성을 고려해 지난해부터 노인참여예산제를 운영하고 있다. 공개모집으로 선발된 노인들이 교육과 워크숍에 참여한 뒤 필요한 정책과 사업을 발굴해 동구에 제안하는 방식으로 활동한다. 전국에서 거의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1기 노인참여예산제에 참가한 노인들은 정책 제안 발표회 후 모임을 꾸려 만남과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동구선배시민모임 ‘울타리’라는 단체다. 이 단체의 총무인 신민자(72·사진)씨를 지난 4일 송림3ㆍ5동 주민센터와 송림도서관 복합건물 1층에 있는 실버카페에서 만났다.

나이 칠십에 바리스타, 삶의 활력소

▲ 신민자 동구선배시민모임 ‘울타리’ 총무
신민자씨는 이 실버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한다. 지난해 11월 중순, 동구노인복지관과 송림도서관에 실버카페가 동시에 문을 열었다. 1기 노인참여예산제에서 제안한 ‘다양한 노인 일자리 창출 사업’을 동구가 수용한 결과다. 점포당 노인 10명씩 일하는데, 한 주는 3일, 그 다음 주는 2일, 하루에 4시간씩 근무한다. 급여는 월 20만원이다.

신씨의 근무시간이 30여분 남았지만, 카페 매니저와 함께 일하는 동료의 양해로 인터뷰를 예정보다 일찍 할 수 있었다. 바리스타로 일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신씨는 “평소 많이 움직이며 살다보니 힘들지 않다”며 “오히려 삶의 활력소 된다”고 말했다. 칠십이 넘어 바리스타라? 계기가 궁금했다. 계기는 노인참여예산제 참여였다.

“1960년대, 여성의 직장생활을 달가워하지 않던 사회 분위기에서도 아버지는 여성도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1년 뒤 결혼하면서 그만 뒀다. 소녀시절 꿈은 항공기 승무원 또는 기자였다. 나이가 차면 결혼해야한다는 아버지 말씀을 따르다보니 꿈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사회의식은, 여성이 결혼하면 직장생활을 그만 두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나도 그랬다. 나중에 세월이 흐른 뒤, 아! 나는 내가 없는 삶을 살았구나, 하는 걸 느꼈다. 집안에서 편안하게 누리고 살다가 40대 중반 천주교 신자가 되면서 사회봉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신씨는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진행하는 리더 양성 특별교육을 받으며 몰랐던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 가르치는 좋은 재능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고 후회했다. 인천의 여러 본당을 돌아다니며 교리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하지만 그 또한 은퇴시기가 있었다. 65세였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 폐기 처분된 느낌이었다. 교회의 입장에선 후진양성이 필요하겠지만, 밀려난 기분이 들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적으로 더 충만해지는 법인데, 안타까웠다. 남편이 1997년 아이엠에프(IMF) 한파가 한창이던 때 명퇴했는데, 그 심정을 그제야 이해하겠더라. 수십 년을 몸담고 젊음을 바친 조직에서 배제된 심정을 뒤늦게 이해했다”

노인참여예산학교 참여해, 새 세상을 보다

그런 그에게 ‘제 3의 인생’이 찾아왔다. 성당에서 함께 봉사하던 나근길(72ㆍ남)씨가 동구 노인참여예산학교에 참가해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나씨는 퇴직교사로 지금은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신씨는 노인참여예산학교에서 새 세상을 봤다고 했다.

“유해숙(사단법인 마중물 대표) 교수님의 사회복지학 강의를 들었는데, 복지에 대해 눈을 떴다. 내 시야가 교회에서 지역공동체로 넓어진 계기였다. 동구에 오래 살았지만, 그동안 애향심이 별로 없었다”

그는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유복했다. 할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했고, 아버지는 광양군수까지 지내셨다. 그는 1962년 무렵 고향이 목포인 이평우(75)씨와 결혼해 서울에서 살다가 남편의 직장을 따라 1985년 동구에 정착했다. 그 때 장만한 삼도아파트에서 아직도 살고 있다.

“그 당시 지인들이 ‘아니, 왜 똥바다로 가느냐’고 할 정도였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생각도 했지만, 교회 때문에 못 떠났다. 동구는 지금, 사람들이 떠나가는 지역이다. 참여예산교육을 들으며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 수 있겠다고 깨달았다”

참여예산학교의 교육 내용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이야기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복지와 관련해 덴마크나 스웨덴의 복지체계 등 외국 선진사례도 접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봉사를 하면서 나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참여예산학교에서 공부하며 복지는 인간의 기본권을 지켜주는 것, 선택이 아닌 기본이라는 걸 알았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 다닐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장학생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1기 노인참여예산학교 참가자들은 교육과 워크숍을 통해 노인들에게 필요한 정책 다섯 가지를 제안했다. 그런 뒤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제안한 정책이 제대로 반영되고 실행되는지, 의회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참여해야 바꿀 수 있다는 의식이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흩어지지 말자고 했다.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함께 가자고 했다. 그래서 모임을 만들었다. 우리 후손들이 인간답게 공동체를 이루며 살게 울타리 역할을 하자고 했다”

동구선배시민모임 ‘울타리’
후손들의 울타리 역할 다짐

▲ 신민자 동구선배시민모임 ‘울타리’ 총무
그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가장 큰 걱정은 아이들 교육문제다. 교육제도가 바뀌어야한다. 아이들이 폭발 직전이다. 대학 가기 위해 살고 있는 것 같다. 내 손자들을 보더라도 친구를 짓밟고 올라가야하는 경쟁대상으로 여긴다. 그 아이들이 만들 세상이 걱정스럽다. 동네 안에서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 또, 요즘 젊은이들은 먹고 살기 바빠 지역에 관심을 두기가 쉽지 않다. 관심이 있어도 참여할 시간도 없다. 그걸 우리 노인들이 해주자는 것이었다.

참여예산학교 참여는 지역공동체 일원으로 눈을 뜨게 했다. 연말이면 왜 멀쩡한 보도블록을 바꾸는지, 낮에도 저 가로등은 왜 켜 있는지, 내 주변을 돌아보게 됐다. 아이들이 맘 놓고 살 수 있는 동네, 젊은이들이 돌아오는 동네, 가난하지만 정다운 사람 냄새가 나는 동네, 그런 동네를 만들고 싶다. 행정은 같은 예산이라도 전시행정 말고 좀 짜임새 있게 썼으면 좋겠다”

1기 노인참여예산학교는 6주 동안에 강의 세 번, 워크숍 두 번, 정책 제안으로 진행됐다. 지난해 5월 8일, 노인참여예산 한마당을 열어 정책제안 우선순위를 투표했다. 359명이 투표했는데, 다양한 노인일자리 창출을 가장 선호했고, 노인 문화시설 확충, 동구 대중교통 불편 해소(순환버스 개설), 노인 건강 알리미 사업, 보건소 각 동 순회 진료가 뒤를 이었다.

동구에서 조례안을 상정했지만 의회 부결로 시행되지 못한 순환버스 신설을 제외하곤 모두 실행되거나 추진 중이다. 1기 노인참여예산학교엔 모두 66명이 참여했고, 그중 48명이 교육을 수료했다. 그 가운데 열여덟 명 정도가 ‘울타리(회장 김일량)’에 함께 하고 있다. ‘울타리’는 매달 정기적으로 운영위원회를 연다.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나"하는 사람 제일 싫어

이야기는 다시 실버 카페와 관련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신씨가 실버 카페에서 일할 수 있는 것도 노인참여예산제 덕분이다.

“내가 직접 혜택을 본 거다. 바리스타 교육을 2개월 받았다. 처음에 제일 어려운 건 계산대를 다루는 것이었다. 또한 메뉴가 다양해 래시피를 보며 만드는데, 지금은 할 만하다. 긴장이 돼 오히려 좋다. 월급 받으면 필요한 데 쓰고, 손자들에게 용돈도 줄 수 있어 좋다”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그에게 같은 노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성경이나 교리 교육을 하다보면, 나이 들어 못한다는 사람이 꽤있다. 그럴 땐 막 화가 난다. 한 번밖에 없는 삶인데, 왜 그렇게 사느냐고. 나이 많다고 으스대지 않고, 내가 가진 걸 나누며 젊은이들과 어울려 살고 싶다.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 제일 싫다. 일어나라 외치고 싶다”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느 때처럼 남편이 차를 몰고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남편이 많이 배려해준다고 했다. 이어, 올해 동구 마을만들기 사업 공모에 신청한 ‘울타리’의 햇빛발전소가 선정됐는데, 동구자원봉사센터 옥상에 햇빛발전소를 설치했고, 오는 15일 개소식을 한다며 구경 오라고 했다.

햇빛발전소를 개소하면 신재생에너지와 관련한 아이들 체험학습도 진행할 예정이란다. 동구의회를 방청해 예산이 제대로 쓰이는지 감시할 것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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