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김약연, 이회영, 독립 위해 학교를 세우다

인천투데이=김도윤 기자│일본제국주의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5년 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면서 일제강점기가 시작됐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한인들은 일제 식민지배와 감시, 수탈을 피해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동북지역의 한인 수가 크게 늘어난다.

동북지역 이주민 중에는 독립운동의 본거지를 해외로 옮겨 활동을 전개하는 독립운동가들도 적지 않았다.

이상설, 민족교육의 산실을 북간도에 세우다

이상설. (사진 국가보훈부)
이상설. (사진 국가보훈부)

이상설은 1870년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1906년 4월 두만강 북쪽의 북간도로 이주해 같은해 9월 무렵 용정에서 이동녕 등과 함께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서전서숙은 이주한 한인과 자녀를 대상으로 신식교육을 실시해 독립운동을 이어가고자 했다.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으로 서전서숙은 설립 1년만에 폐교됐으나 교육이념은 1908년 명동서숙과 1911년 신흥강습소 설립에 영향을 미쳤다.

이상설은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났다. 그곳에서 미국, 독일, 중국 등에 한국 독립을 위한 협조를 구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후 1909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해 항일무장투쟁 근거지 건설에 힘쓰다 1917년 3월 별세했다.

김약연, 명동서숙 설립해 민족교육을 잇다

김약연.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약연.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1868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김약연은 1899년 김하규, 문치성, 남위언 등과 함께 가문을 이끌고 북간도 명동으로 이주해 한인 마을인 명동촌을 세웠다.

김약연 역시 일제로부터 독립을 위해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깨닫고 1908년 4월 27일 명동서숙을 설립했다. 1925년 명동서숙이 폐지될 때까지 학생 1000여명을 배출했다.

명동서숙이 배출한 인물로 저항시인 윤동주(1917~1945), 독립운동가이자 영화인인 라운규(1902~1937) 등이 있다.

김약연은 또 1913년 한인자치단체인 간민회를 결성하고 한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과 항일사상 등 교육활동을 하다 1942년 용정에서 별세했다.

이회영,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다

이회영. (사진 이회영기념관)
이회영. (사진 이회영기념관)

이회영은 1867년 3월 17일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다. 1904년 항일운동의 거점을 국외에 마련하기로 계획하고 이상설을 북간도 용정에 파견했다.

이후 이동녕과 여준이 용정으로 이동해 이상설과 함께 항일민족교육의 산실인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이회영은 1910년 8월 한일병합 이후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에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하기로 한 뒤 같은해 12월 삼원보로 이주했다.

1911년 이동녕, 이상룡 등과 함께 삼원보에 땅을 구입해 중국인의 한인 차별 금지와 한인의 토지 소유를 위해 자치단체인 경학사를 만들었다.

또한 민족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를 세워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이후 신흥강습소는 간도 지역 흉년 등의 이유로 경학사와 함께 1912년 통화현으로 옮겨갔다.

1913년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으로 개명했고 1915년 5월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했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8월 폐교전까지 군사인재 2000여명을 양성했다.

이회영은 일생을 독립운동에 전력하다 1932년 11월 일본경찰에 체포돼 여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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