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사람] 김주성 한국무용협회 인천시지회장

훤칠한 키에 비니(머리에 딱 맞는 모자)를 쓴 이가 커피숍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또렷한 생김과 달리 어딘가 어색한 표정이다. “커피숍은 하도 오랜만이어서요” 의외의 대답이다. 요즘 커피숍만큼 흔한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지난 19일, 이달 취임한 김주성(40·김주성이데아댄스컴퍼니 대표·사진) 한국무용협회 인천시지회장을 만났다. 저녁도 거른 채 두 시간 동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막연히 갖고 있던 ‘무용인’에 대한 편견이 조금씩 깨지는 듯했다. 그가 흔치 않은 남자무용수로서, 그것도 젊은 나이에 지회장이라는 쉽지 않은 직을 맡게 된 내막이 궁금했다.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져 그가 무용을 시작할 무렵에 가 닿았다.

“사람이 하는 동작 맞아?”

▲ 김주성 한국무용협회 인천시지회장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리 길지 않은 돌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건너편에 형들로 보이는 이들이 무리지어 서 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모른 척 지나려는데 역시나, 가는 길을 막아섰다. 돈을 내놓으란다. 돈이 없다고 하자 마구 때렸다. 코뼈가 부러진 건 중요치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킥복싱을 배우기로 했다. 얼마 후 그는 학교 ‘짱’을 먹었다.

“중 2때 키가 170cm를 넘었어요. 큰 편이었죠. 초등학교 때 탁구를 해서인지 운동신경도 꽤 좋았어요. 킥복싱도 금방 배웠죠. 친한 친구가 학교 ‘짱’에게 맞는 바람에 대신 싸우다가 (제가) 짱이 됐는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같은 학교 아이들을 심하게 괴롭히진 않았어요.(웃음)”

고등학교에 올라 간 뒤 어느 날이었다. 별 뜻 없이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영화 한 편을 보게 됐다. ‘백야’(테일러 핵포드 감독)였다. 영화 속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에게 큰 놀라움을 안겼다.

“사람 다리가 어떻게 그리 쭉쭉 올라가고 벌어질 수 있는지 정말 신기했어요. 사람이 하는 동작 같지가 않았어요. ‘저걸 배우면 킥복싱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배울 수 있는 곳을 수소문했죠”

“남자는 두 달도 못 견딘다”는 말에 오기로 버텨
얼마 후 친구 여동생이 다니는 발레학원을 찾아갔다. 춤이라는 신세계에 발을 들인 첫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민망함과 쑥스러움, 난처함 등이 뒤섞여 지금까지 생생히 남아 있다.

“여학생들이 수영복(발레복의 일종인 레오타드)만 입고 있는데,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남자는 물론 없었죠. 당시 제가 살던 청주 전체를 통틀어서 저 한 명이었어요”

스트레칭을 배우러왔다는 그에게 학원장은 “키가 크고 마스크(얼굴)도 좋으니 무용수로도 괜찮겠다. 잘해봐라”는 말을 건넸다. 곧이어 묘한 느낌의 말을 덧붙였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두 달을 버틴 남학생이 없었다’고 하시면서 두 달 동안 학원비를 안 받겠다는 거예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해서 근성 하나는 자부하는데 말이죠. 오기가 생기더군요.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달을 넘기겠다고 결심을 했어요”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안 될 줄 알았던 ‘다리 찢기’와 ‘턴’(돌기) 동작이 그의 몸에서도 점점 완성돼가고 있었다. 무용이라는 예술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학원비를 마련해야했다.

“무용학원에 다니겠다는 말을 차마 아버지께 할 수가 없었어요. 집안 사정도 안 좋았고요. 당시 막일을 하면 하루에 2만원을 벌 수 있었어요. 형과 누나가 조금 도와주면 할 수 있겠다 싶어 계속 다니기로 했죠”

1년을 넘게 학원에 다니면서도 대학에서 전공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고3 여름방학, 한 대학이 주최한 무용대회에 우연히 나갈 기회가 생겼다. 1등을 하면 그 대학 무용과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과 함께 첫 학기 학비가 주어지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결과는 1등이었다. 그는 이듬해 무용과 대학생이 됐다.

“돈도 없는데 무슨 무용을 하나”

▲ 김주성 한국무용협회 인천시지회장
그러나 대학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무용과는 기본적인 학비 외에도 돈이 많이 들어갔다. 작품에 따르는 의상비는 물론 교수들이 여는 특강비를 마련하기도 벅찼다. 그에게는 ‘돈도 없는데 무슨 무용을 하나’ 하는 시선이 늘 따라다녔다. 그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는 학교를 휴학하고 새벽마다 인력시장에 나가 막일을 했다. 젊은 데다 체격이 좋은 그는 늘 일순위로 뽑혔다. 대규모 공사장에서 몇 달씩 먹고 자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막일을 하던 이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 분이 제게 ‘넌 왜 이 일을 하고 있냐. 난 지금 이것밖에 할 게 없어 이 일을 한다. 다시 태어난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넌 아직 젊으니 네 할 일을 찾아라’고 하시는 거예요. 듣고 보니 ‘나도 춤이 싫어서 그만 둔 게 아니잖아?’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단지 돈이 문제였던 거죠”

이 말이 계기가 돼 그는 이듬해 다른 대학에 신입생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했지만, 포기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무용수로서 활동하다가 2005년엔 자신의 이름을 건 현대무용단 ‘김주성 이데아 댄스컴퍼니’를 만들었다. ‘이데아’는 그가 대학시절 즐겨 읽던 철학 책에서 따왔다. 그에게 춤은 예술이자 철학의 실현이다.

돈이 없어 무용을 못하는 이에게 기회 주고 싶어

미술이나 문학, 교향악에 비해 무용은 아직 대중의 관심에서 한참 멀다. 무용을 예술이 아닌 ‘체육’의 일종으로 보는 시각도 여전하다. 그나마 한국무용은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하지만, 현대무용은 척박한 땅에서 스스로 살아남아야하는 처지다. 그는 인천시민들에게 현대무용을 더 많이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렇다고 지회장으로서 현대무용을 더 두드러지게 드러낼 생각은 없다.

“무용이 설 수 있는 자리가 너무 좁아요. 어떤 장르가 됐든, 춤을 출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드는 게 우선이겠죠. 후배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넓어졌으면 좋겠어요”

지회장으로서 그가 맡은 굵직한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시민들과 만나는 ‘인천 춤길’, 무용수들의 무대 ‘인천국제무용제’, 그리고 무용인을 발굴하는 ‘콩쿠르’를 차질 없이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이 1차 과제다. 여기에 더해 내년 ‘전국무용제’를 인천에 유치하기 위한 활동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개인적으론 무용단 살림과 단장으로서 안무도 계속 해야 한다. 지회장이 된 이후, 하루에도 몇 차례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느라 정신이 없는 그가, 특별히 관심을 쏟는 것이 있다.

“제가 어렵게 무용을 했잖아요. 저처럼 무용을 하고 싶은 데도, 단지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거나 돈이 없어 못하는 이들이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특히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더 취약하죠. 그들을 위한 교육과정을 열고 싶어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그는 마지막으로 뜬금없이, 하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저는 춤만 알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해타산에 능하지 않아요. 사업가나 정치가가 아닌, 예술가로서 협회를 이끌어나가겠습니다. 저희가 하는 일에 관심 많이 가져주시고 응원도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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