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책으로 세상 읽기 15. ‘예수의 생애’와 ‘천로역정’

예수의 생애 | 르낭 저 | 창
천로역정 -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여정 | 존 버니언 저 | 포이에마

2023년 12월 말,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러·우 전쟁은 끝날 줄을 모르고,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마찬가지다. 팔레스타인 사망자 수만 2만 명이 넘었고, 3분의 2 이상이 노인과 어린이라고 한다. 미얀마는 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세상은 엉망진창인데, 해답을 찾기는 어렵다. 12월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달이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던 예수님이 만일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어디로 오실까? 오셔서 이 세상을 보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혹시 잘 못 오셨다고 돌아가시지는 않을까? 성격이 조금 다른 기독교 관련 고전인 <예수의 생애>와 <천로역정>을 읽었다.

르낭의 시선으로 본 예수, 역사 속의 인물로서 그리스도

먼저 <예수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예수의 생애>는 프랑스의 철학자요, 언어학자요, 비평가인 에르네스트 르낭이 쓴 예수의 전기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를 ‘역사적 예수’로 바라봤다는 것이다. 그래서 출간 초부터 논란이 컸다.

예수는 단순히 ‘신화’ 속 인물인가, 아니면 실존 인물인가? 예수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그의 전기를 재구성할 수 있을까? 르낭은 후자의 입장이었다.

그는 예수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는지, 그가 걸어가던 곳, 쉬던 물가는 구체적으로 어디였는지 등등, 예수가 살았던 곳의 지리와 역사와 문화를 포함하여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그리려고 노력했다. 예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키는 큰지 작은지, 피부와 눈과 머리카락은 무슨 색깔이었는지, 주로 무슨 옷을 입었는지 탐구했다.

르낭은 예수가 살았던 곳을 두루 살폈다. 예수가 지나갔으리라 생각되는 곳, 쉬었으리라 생각되는 곳을 모두 찾아갔고, 그 지방의 풍경을 보고 예수의 언행을 이해했다. 팔레스티나 광야를 직접 자기 발로 걸어보고 예수의 행적을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본 이는 르낭뿐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다. 이 책의 제2장 예수의 어린 시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갈릴리(‘이방인들의 모임’이라는 뜻) 주민들은 그 이름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인종 혼합이 아주 심했다. 그는 평민 계급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 요셉과 모친 마리아는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고사는 증류 계급의 사람들이었다. 근동 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서, 그 형편은 유복하지도 곤궁하지도 않은 편이었다.

이런 지방에서는 생활이 극히 단순하기 때문에 우리나라(프랑스)에서와 같이 생활을 안락하고 쾌적하게 해주는 것들이 필요 없고 부자의 특권이 거의 쓸데없으며, 또 누구나 가난하게 산다.

한편, 예술에 대한 취미나 물질적 생활을 우아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에 대한 취미가 전혀 없으므로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사람의 집도 매우 초라해 보인다. 나사렛 마을은 예수 당시에도 아마 오늘날과 별로 다름이 없었으리라. 우리는 돌이 많은 골목길에서 어렸을 때 그가 놀았던 길거리를 본다.

요셉의 집은 문으로 들어오는 광선으로 방을 밝히며, 작업장, 부엌, 침실을 겸하며, 가구라고는 돗자리 하나, 땅바닥에 까는 방석 몇 개, 질항아리 한두 개, 그리고 채색한 뒤주 하나밖에 없는, 보잘것없는 가게방과 무척 비슷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가족은 한 번의 결혼에서인지 여러 번의 결혼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숫자가 많았다.

예수에게는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그중에 그가 맏이였던 것 같다. 동생들과 누이들은 여태껏 분명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의 동생이라 하여 이름이 나온 네 사람(그중 적어도 야고보는 그리스도교 발전 초창기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는데)은 사실 그의 사촌 형제들이었다.

사실 마리아에게는 마리아라는 같은 이름의 동생이 있었는데, 이 동생은 알패오 혹은 글레오파(이 두 이름은 동일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라는 사람의 아내요 또 예수의 최초의 제자들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여러 사람의 어머니였다.

예수의 친동생들은 예수를 반대했지만, 이 사촌 형제들은 젊은 스승을 열심히 섬겨, ‘주님의 형제’라는 칭호를 얻었다. 예수의 친동생들은 그의 모친과 마찬가지로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널리 알려졌다. 그래도 그들은 사촌 형제들만큼은 존경을 받지 못하였다.

이 사촌 형제들의 회심은 좀 더 자발적이었고, 또 그들의 성격은 좀 더 독창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 친동생들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예수의 생애 | 르낭 저 | 창
예수의 생애 | 르낭 저 | 창

르낭의 눈으로 본 예수, 역사와 신성 사이의 균형

어쨌든 이 책은 간행된 지 4개월 안에 6만 부가 팔렸고, 1년 반도 안 되는 동안에 11개 국어로 번역됐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책이 나왔을 때 찬사도 있었지만, 비난도 많았다. 기독교에서 신으로 받아들여지는 예수를 역사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이 그 논란의 핵심이었는데, 이 책에 대한 찬사의 맨 앞자리에는 고흐가 있었다.

“르낭의 저 훌륭한 책을 아직 다 되풀이해서 읽지는 못했지만, 올리브나무와 독특한 식물과 푸른 하늘이 있는 곳에서 어찌나 그 책이 자주 머릿속에 떠오르던지… 아아, 르낭은 얼마나 옳으며, 누구도 말하지 못하는 프랑스어로 그가 들려주는 저 작품은 얼마나 멋진가.” 고흐가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다.

비난의 맨 앞자리에 있었던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슈바이처다. 그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해 ‘연구자의 가장 이상적인 인물상을 그려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비난했다. 예수를 연구자의 입맛대로, 때로 계몽사상가로, 때로 낭만주의의 천재로, 때로 철학자로, 때로 혁명 투사로, 때로 예언자로 그렸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에게서 ‘신성성’을 빼앗고 ‘감상적’인 인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르낭은 종교의 본질이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자의 마음의 움직임에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귀한 것은 신조나 제도가 아니라 예수의 인격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에 대한 사랑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예수가 죽음 후에도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들었다는 것이 예수가 하신 일의 본질적 성격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르낭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도 날마다 세계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는 이 숭고한 인물을 신이라 부를 수 있겠다. 이것은 예수가 신성의 모든 것을 흡수했다거나 신과 일치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류가 신을 향한 최대의 걸음을 내딛게 한 개인이라는 의미에서다. 전체로 볼 때, 인류는 좀 더 반성적이라는 점에서만 동물보다 나은, 비천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의 집합일 따름이다.

하지만 이 한결같은 범속성 한가운데에 몇몇 원주가 하늘을 향하여 솟아있어서 보다 숭고한 운명의 증인이 되고 있다. 인간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인간에게 가리키는 이 원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예수다.

위대한 창의가 다시 나올 것인지, 세계가 이 이후로는 옛날의 여러 시대의 대담한 창조자들에 의하여 열린 길을 그대로 밟아 가는 것으로 만족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바 없다. 그러나 장차 어떤 뜻밖의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능가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의 종교는 끊임없이 젊어지리라. 그의 전설은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을 자아내리라. 그가 당한 고난은 가장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감동을 주리라. 모든 세기는 사람의 아들들 가운데 예수만큼 위대한 자가 태어난 적이 없었다고 선포해 가리라.” 르낭은 예수를 역사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예수의 신성성을 깎아내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 같다.

존 버니언과 그의 명작 천로역정, 신앙과 인생의 서사

<천로역정>은 영국의 작가이자 목회자였던 존 버니언이 쓴 소설이다. ‘제2의 성서’로도 불리고 있는 이 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라는 명성도 가지고 있다. 아무튼 <천로역정은> 기독교를 믿든 믿지 않든 생애 한 번은 정독해야 할 기독교 문학의 고전이고 필독서다.

내용은 간단하다. 책의 제목처럼 ‘멸망의 도시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던 주인공 ‘크리스천’이 ‘천국’(‘천성)'을 찾아 떠나는 ‘여행기’다. 이 소설을 우리 식으로 굳이 분류하자면 우화소설, 우의소설, 몽유소설로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형식을 보면 작가가 꿈을 꾸는 것으로 시작해서 크리스천이 천국에 도착하는 순간 잠에서 깨어난다. 그런 면에서 ’몽유록‘ 계열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고전소설인 김만중의 <구운몽>과 닮았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이 책의 주인공 크리스천은 어떤 책을 발견한 뒤 죄의 짐을 진 채 괴로워하다가 ‘전도사의’ 말을 듣고 '좁은 길'을 따라 천성으로 향한다. 여행길에 “전도자, 신실, 소망, 우유부단, 고집, 변덕, 도움, 세속현자, 선의, 해석자, 문지기, 겁쟁이, 불신, 경건, 신중, 자비, 마귀, 수다쟁이, 질투, 미신, 아첨꾼, 재판관, 사심, 절망의 거인, 구두쇠, 성실, 무지, 무신론자” 등 여러 등장인물을 만나 도움을 받거나, 방해를 받는다.

그러나 “절망의 늪, 좁은 문, 해석의 집, 곤고의 산, 겸손의 골짜기, 음침의 골짜기, 헛됨의 시장, 의심의 성, 기쁨 산맥, 마법의 땅” 등을 거쳐, 결국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원히 살게 될 영원한 나라'인 천국에 도착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주요 내용은 성경에 나오는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제2의 성서’로 불리는 이유다.

책 뒤에 나오는 버니언의 연보를 보면 만 60년에 그친 그의 삶은 이렇다 할 학력도 경력도 없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존 버니언은 이 책이 나왔을 때 천재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는 1628년 영국 베드퍼드 근처 엘스토에서 땜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집이 어려워 평생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열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땜장이 일을 배웠다. 16세에 징집 당했고, 군대가 해산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땜장이 일을 계속했다. 22세 무렵 첫 번째 부인과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비록 기록도 없지만, 그의 첫 번째 부인은 큰 역할을 했다. 지참금으로 두 권의 청교도 서적을 가져왔고 그 책을 통해 버니언이 예수를 처음 알았고 신앙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버니언은 베드퍼드의 침례교회 목사를 만나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베드퍼드로 이주한 후 버니언은 설교하기 시작했다. 30세 넘어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엘리자베스와 재혼했다. 설교를 금지하던 당시 불법 집회를 인도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힌 후 무려 12년이나 옥살이를 했다.

5년여 동안 감옥에서 오직 성경만을 참고하며 집필한 책이 바로 <천로역정>이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목사가 됐으며 그 후 설교자로 활동하며 60권 넘는 책을 썼다. 만 60세 되던 1288년 비를 맞으며 말을 타고 런던으로 갔다가 폐렴에 걸려 친구 집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천로역정 -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여정 | 존 버니언 저 | 포이에마
천로역정 -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여정 | 존 버니언 저 | 포이에마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신앙과 인생의 교차점에서

“한 마디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영원한 상급을 쫓는 남자의 이야기다. 진귀하고 유익한 걸 원하는가? 우화 속에서 진리를 보고 싶은가? 우울한 감정에서 벗어나 기분을 전환하고 싶은가? 유치하지 않으면서 유쾌해지고 싶은가? 수수께끼를 읽으면서 그 해답을 찾아보고 싶은가? 깊은 묵상에 빠져보고 싶은가? 잠들지 않은 채 꿈을 꾸고 싶은가? 환하게 웃으면서 동시에 눈물 흘리며 울고 싶은가? 넋을 잃었다가 악한 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고 싶은가?

책을 읽어 나가는 동안, 한 장 한 장 그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할지라도 자신을 살피며 과연 축복을 받은 백성인지 알아보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서 오라, 이 책의 세계로!”

존 버니언 자신이 ‘이 책에 대한 변명’이란 제목으로 책 맨 앞에 써놓은 글이다. 자신의 책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글이다. 205쪽부터 207쪽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 약간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돈사랑’의 말이다. “무슨 뜻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겠네. 괜찮다면 내가 먼저 대답해봄세. 일단 그 남자를 목사로 가정하고 이야기해보자고, 훌륭한 인품을 가졌지만 워낙 박봉이어서 월급이 오르고 영향력도 커지길 간절히 바란다고 하세.

그런데 더 열심히 연구하고, 더 자주 더욱 열정적으로 설교하며, 교인들의 기호와 성향에 맞게 원칙을 약간 수정하기만 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때 어떻게 해야겠는가? 나는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보네. 오히려 필요하다면 더 과감해져야 한다고 믿네. 거리낄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지. 이유를 꼽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라네.

첫째로, 하나님의 섭리로 더 많은 수입을 올릴 기회를 얻었으니 그걸 잡고 싶어 하는 건 눈곱만큼도 문제 될 게 없네. 양심에 거리낌을 느낄 필요 없이 기회를 잡으면 그만이지.

둘째로, 더 많은 수입을 올리려는 욕구 덕분에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열정적으로 설교해서 더 나은 목회자가 되었네. 삶의 모든 측면에서 한층 발전한 거지. 그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셋째로, 교인들의 눈에 들기 위해 관점과 원칙들을 수정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네. 이건 세 가지 미덕을 가졌다는 뜻일세. 자기를 부인하는 성품을 지녔고, 따뜻하게 마음을 끄는 재주가 있으며, 그래서 목회자 노릇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말이지.

넷째로, 이런 점들을 종합해볼 때, 대의를 위해 사소한 것들을 희생한 걸 가지고 '탐욕스럽다'라고 판단해선 안 될 걸세. 그런 결정을 내림으로써 능력을 개발하고 열심을 키웠으니 도리어 주님의 뜻을 좇았다고 칭찬해주어야 마땅해. 목사가 잡은 기회는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물이었던 셈이고.”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제공 프란치스코 교황 SNS)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제공 프란치스코 교황 SNS)

예수님이 한국에 오셨다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갈 이유가 한둘인가

존 버니언이 현재의 대한민국의 일부 교회의 세태를 미리 내다보고 ‘돈사랑’의 입을 빌려 비꼬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에 감리교 이동환 목사가 성 소수자에게 축복식을 했다는 이유로 교단에서 출교 판결을 받았다는 기사를 봤다. 더욱 해괴한 건, 항소를 청구하려면 수천만 원을 내야 한다고 한다. 성 소수자 축복식이 교황은 가능하다고 하는데, 대한민국 교회는 안 된다고 한다.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오셨다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갈 이유는 한둘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의 이런 거룩한 말씀은 이제 성경에만 나오는 세상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신현수 시인은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서울문화재단 이사, 비영리민간단체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모임(방갈모)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직무대행),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집행위원 등으로 일했다. 
신현수 시인은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서울문화재단 이사, 비영리민간단체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모임(방갈모)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직무대행),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집행위원 등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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