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과학이야기 61. 마녀사냥 ③

마녀인지 아닌지 어떻게 가려냈을까?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그 중 한 가지는 물에 빠트리는 것이다. 마녀라면 악마가 구해줄 테니 죽지 않을 것이고, 만일 빠져 죽으면 마녀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일단 마녀로 지목된 사람은 화형 또는 익사, 둘 중 하나의 길로 가게 돼있었다.

마녀사냥은 당시 최고로 발달한 멀티미디어에 의해 대중에게 확산됐다. 그래서 ‘멀티미디어 선동을 활용한 유럽 최초의 박해’(<캘리번과 마녀>, 실비어 페데리치 지음)라 불린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인쇄술은 지금으로 치자면 스마트폰에 비할 정도로 새롭고 확산력이 빠른 매체였다. 이 뛰어난 발명품이 처음 활용된 예가 바로 마녀들의 악행과 재판을 홍보하는 것이었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인쇄물에 시각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서는 적절한 그림이 필수였다. 친절하게도 마녀 인물화를 그릴 예술가도 따로 모집했다. 마녀는 탐욕스럽고, 추하고, 때론 벌거벗겨진 모습으로 그려져 성적으로도 착취됐다.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한 1580년부터 1630년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이들이 근대철학과 문학ㆍ과학을 완성해간 시기였다. 베이컨, 갈릴레오, 셰익스피어, 파스칼, 데카르트 등이 바로 그들이다.

당시 유럽 지식인들이 가장 좋아하던 토론 주제는 바로 마녀에 관한 것이었다. 지성(知性)의 별들에게도 악마의 사주를 받은 마녀는 마땅히 처벌해야 할 대상이었다. 행성의 법칙을 정립한 천재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의 어머니도 마녀로 몰려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는 황실 수학자를 아들로 둔 덕분에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마녀사냥이 행해진 2세기 동안, 20만에서 50만여 명이 산 채로 화형을 당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마녀사냥은 유럽사 또는 세계사에서 가장 연구가 덜 된 분야이고, 역사책에서도 마녀사냥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가난한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의 딸과 아내, 그리고 어머니였기 때문일까? 우리가 배우는 역사가 ‘반쪽짜리 역사’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마녀사냥은 난데없이 등장한 것만큼이나 갑자기 사라졌다. 아니, 강제로 사라짐을 당했다. 17세기 들어 새로운 사법체계가 정립되면서 더 이상 개인이 마녀를 색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근대 재판에서 죄를 입증하기 위해선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물에 빠트리는 것이나 뼈를 으스러트리는 고문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 돌이켜 볼 때, 마녀사냥이란 얼마나 한심하고 무식하고 덜 떨어진 행동인가. 고등동물로서 이성(理性)을 지닌 인간이 어디 할 짓인가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한다. 마녀사냥은 정말 사라졌을까? 마녀라 지목된 순간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나가고, 이와 다른 목소리는 무수한 돌팔매질로 파묻혀 버리고, 결국 ‘마녀’는 온갖 모욕을 겪으며 만신창이가 되고야마는 이 과정이, 왠지 낯설지 않다. ‘된장녀’ ‘개똥녀’ 등 수많은 XX녀들의 사진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전파를 타고 손에서 손으로 날아다닌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동성애자는 방송인 홍석천과 영화감독 김조광수뿐이다.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빨갱이’라는 말은 또 어떤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진 마법과도 같은 주문이다.

마녀사냥은 뼈아픈 성찰과 반성을 통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제도가 겨우 가림막이 되어주었을 뿐, 아직까지 우리 곁에 생생히 살아있다. 인간이 이성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아닌 경우가 훨씬 많다.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고, 과거의 그늘에 갇히며, 언제든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을 반복해 깨닫는 것만이 마녀사냥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참고도서 : ‘캐서린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마녀 프레임’(이택광 지음), ‘카타리나 케플러’(카챠 두벡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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