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기 장군이 지키고자 한 ‘서울의 봄, 국민 모두의 봄'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1979년 12.12쿠데타를 소재로 지난 11월 22일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 열흘만에 누적 관객 300만명을 동원하며 연일 화제다.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 당시 반란군의 수괴 보안사령관(현 국군방첩사령부)이었던 전두환(극중 전두광, 황정민 역)이 군부내 사조직 하나회(육사11기 사조직)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나선 진압군과 반란군 간 9시간 동안 벌어진 사건을 담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 속 윤흥기 장군 (사진출처 영화 서울의봄)
영화 '서울의 봄' 속 윤흥기 장군 (사진출처 영화 서울의봄)

반란수괴들의 최후를 보고 눈을 감다

그날 밤 전두환을 포함한 신군부 국가 반란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나선 핵심 장군에 해당하는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영화속 정우성), 정병주 특전사령관(정만식), 이건영 3군사령관(박원상), 김진기 육군헌병감(김성균), 윤흥기 9공수여단장(정형석),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문홍구 합참본부장 등이 분투했다.

애석하게도 반란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 했던 ‘참군인’들은 진압에 실패한 후 전원 체포돼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이등병으로 강제 예편 되거나 좌천돼 군복을 벗어야 했다.

특히, 전두환 일당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특전사령부 윤흥기 장군이 이끌던 9공수여단은 12·12군사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반란이 일어난 서울을 향해 진군하고 있던 최후의 보루였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9공수 여단이 반란군이 모여 있던 30경비단을 진압했더라면 12.12쿠데타를 막을 수 있었고,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윤흥기 장군은 진압에 실패했으나 강제 예편 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12.12군사반란 수괴를 재판정에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전두환과 노태우 등 반란수괴들이 내란죄로 감옥을 가는 것을 다 지켜본 후, 2013년 8월 병세 악화로 별세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

윤흥기 장군은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에 의해 예비역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지난 1979년 12·12 반란 당시 수도권 4개 공수여단 중 유일하게 육군본부의 정식 지휘계통에 속한 제9공수여단장이었다. 1공수와 3공수여단 등은 이듬해 광주에 내려가서 무고한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반란 당일 진압군 측 유일한 출동부대였던 9공수여단의 주둔지는 현재 인천대공원 인근이었다. 윤흥기 여단장과 부대원들은 “전두환 신군부 반란세력을 진압하라”는 육군본부의 명령에 바로 출동했다. 윤 장군이 이끄는 9공수여단은 신군부 반란 세력인 1공수여단 보다 빨리 서울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다.

윤 장군은 여단 예하 부대를 이끌고 서둘러 경인고속도로를 이용해 서울로 향했다. 12일 당일 오후 11시 40분에 경인고속도로 부천IC를 지날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골든타임을 놓쳤다. 만약 바로 서울로 진입했더라면, 전력상 우위에 있는 9공수여단이 전두환 신군부 반란세력을 진압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중앙 윤흥기 장군,  왼쪽 전임 여단장이었던 노태우, 오른쪽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중앙 윤흥기 장군,  왼쪽 전임 여단장이었던 노태우, 오른쪽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지키지 못한 서울의 봄, 국민의 봄

그러나 진압군 내 지도부가 어리석었다.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장이 전두환 반란군 일당에 붙잡혀 있을 때 육군본부를 지휘하던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이 바로 진압을 했어야 했는데 우물쭈물 거리다 그러지 못했다. 

9공수여단은 '같은 국군끼리 총부리 겨누지 말자'라는 반란군의 거짓 기만작전이었던 신사협정에 속은 윤성민 육국참모차장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았다. 윤흥기 여단장과 9공수여단은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 토벌을 위한 결정적인 국면에서 9공수여단의 경인고속도로 회군은 서울역 회군보다 더 안타까운 사건이다.

그사이 반란군 세력인 1공수여단이 서울로 진입해 장태완 수비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헌병감 등 진압군 지휘부의 무장을 해제하고 반란에 성공했다. 

12·12 반란 직후 윤흥기 장군은 한직을 돌다 1983년 1월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차장을 끝으로 30년 생활한 군복을 벗었다.

사필귀정

윤흥기 9공수여단장은 전역 후에도 자신의 회군으로 인해 반란군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져 살았다. 윤 장군은 지난 과오를 씻고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12·12 쿠데타 당시 육군본부의 정식지휘체계에 속했던 장군 22명을 규합해 1993년 7월 19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사반란을 주도한 34명을 ‘반란 및 항명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소했다.

같은 해 10월 검찰이 12·12 반란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리지만, 광주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노태우 두 반란수괴 구속을 요구하는 거대한 국민 저항에 직면한다. 

결국 1995년 1월 헌법재판소는 12·12 반란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검찰은 이번엔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게 공소권이 없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했다.

하지만 5·18특별법을 제정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적 요구는 들불처럼 타올랐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그해(1995년) 11월 비자금 관련사건으로 구속되면서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자유당에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검찰은 12·12 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해 재수사에 착수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반란수괴 등 혐의로 12월 구속 수감됐다. 같은 달 5·18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1996년 1년 내내 전두환·노태우 피고인들의 12·12내란 혐의,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 진상규명, 비자금 관련 공판이 진행됐다.

마침내 재판부는 1997년 '12·12는 명백한 군사 반란이며 5·18광주에서 신군부의 만행은 내란 또는 내란목적 살인행위'라고 적시했다. 무소불위 독재자이면서 학살자였던 전두환 역시 사법심판을 피할 순 없었다. 하지만 전두화는 그는 끝내 사과하지 않고 용서 받지 못한채 눈음 감았다. 그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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