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과 청산리전투 승리, 항일무장투쟁 역사의 큰 줄기

국내에서 더는 의병활동이 어려워지자 1908년 가을 연해주로 건너간 홍범도는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과 그의 단지동맹 단원이자 훗날 친일파로 배신한 엄인섭도 만난다.

그리고 연해주 한인과 독립운동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인 페치카(벽난로)로 불리는 최재형 선생도 만난다.  또한 이범윤과 유인석 지사도 만나게 된다. 

1909년 6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선 유인석과 이범윤(대한제국 당시 고종이 보낸 간도관찰사), 홍범도,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칠 ‘13도 의군’이 조직된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열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다. 하지만 13도 의군의 국내 진공은 일제가 러시아에 항의해 러시아가 유인석과 이범윤을 체포하면서 무산되고 만다.

2권의 빼놓을 없는 주인공이 있으니 바로 조선인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가인 러시아극동인민정부 외무장관 김알렉산드라이다.

항일 애국지사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킴(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 1885년 2월 22일~ 918년 9월 16일)은 러시아에서 착취 당하며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를 위해 헌신했고, 연해주에서 항일 독립운동과 무산자 계급의 해방을 위해 헌신했다.

김알렉산드라는 홍범도 장군을 돕고, 대한제국 강화유수부 진위대장 출신 이동휘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총리도 돕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총리를 지낸 이동휘 지사는 일제와 고종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 할 당시(1907년) 그 역시 강화유수부 진위대장을 내던지고 의병을 모의하다가 헤이그특사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그가 나중에 연해주로 넘어가 한인사회당을 만들 때 그 토대를 이미 다져놓은 혁명가가 바로 김알렉산드라이다.

맹인을 위한 한글 훈맹정음을 강화 교동사람 송암 박두성 선생이 창제했는데, 박두성 선생의 호 송암은 이동휘 지사가 지어주신 것이다.

소설 범도 2권 '봉오동의 그들'
소설 범도 2권 '봉오동의 그들'

연해주에서 페치카로 불렸던 최재형 지사는 안중근 열사와 함께 단지동맹 단원이며,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가장 먼저 설립된 대한민국 노령임시정부(=대한국민의회, 1919년 3월 17일)를 설립한 주역이다. 최재형 지사의 고손자가 현재 인천대학교에서 공부 중이다.

안중근 열사 즉,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한국(대한제국) 초대 통감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게 1909년 10월 26일의 일이다. 홍범도가 자신보다 10여살 젊은 청년 장군 안중근을 만난 건 그러니 1909년 초쯤이다.

이범윤과 최재형 선생은 연해주에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양반출신과 농민 출신 모두를 망라해 권업회를 만든다. 권업회는 한인들의 연해주 정착을 돕는 기관이자 항일독립운동 단체다.

이시기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연방(노동자와 농민이 구성한 소비에트 인민정부)이 탄생한다. 제정러시아 쪽 백군과 소비에트 쪽 적군이 내전을 치른다. 일제는 백군과 손잡고 항일독립운동가를 탄압한다. 이 과정에서 김알렉산드라는 백군에 체포 돼 우수리스크에서 총살로 순직한다. 그녀는 독립 된 조국의 13도를 의미하는 13발을 걸어가서 자신이 죽을 곳을 정했다. 백군이 총살을 앞두고 눈을 가리자 그녀는 자신을 죽이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볼 것이라며 안대를 치우라고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가장먼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월 17일 이동휘와 문창범의 주도로 앞서 얘기한 대한민국 첫 임시정부인 대한국민회의(노령임시정부)가 설립된다. 최재형 선생은 노려임시정부 설립의 주역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다.

이동휘는 좌우합작을 위해 대한국민의회 의장을 러시아 백군과 친했던 문창범에게 양보하고, 본인은 국방부 장관 격인 군사부장을 맡았다. 홍범도는 국방부장 아래 사령관을 맡는다.

노령임시정부 설립 이후 4월에 상해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가 잇따라 설립됐다. 이 세 임시정부는 그해 9월 13도 대표자가 인천에서 결의를 토대로 구성했던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하고 상해에 임시정부를 둔다. 현재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1919년 수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1조와 같다.

임시정부 중 대한민국의회의 군사조직은 대한독립군이고 군무총장은 이동휘이며 총사령관은 홍범도 장군이다. 홍 장군은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대한독립군 중 전쟁 자금을 조성하러 갔던 철혈광복단원이 일제의 조선은행을 털어 15만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으나 안중근의 단지동맹 단원이요 홍범도와 같이 활동했던 밀정 엄인섭에 의해 일제한테 검거되고 그들은 감옥에서 순국하고 만다.

홍범도는 굴하지 않고 다시 대한독립군을 추슬러 봉오동으로 간다.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연 봉오동전투가 펼쳐진다. 대한민국의회 군무총장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총리 이동휘는 만주와 연해주에 흩어져 있는 각 독립군무장단체에게 연대연합을 호소한다.

홍범도는 봉오동으로가서 최진동-최운산-최치형 3형제가 이끌던 군무도독부와 먼저 합친다. 그리고 최진동에게 총사령관을 맡게 한다.

그 뒤 최운산 장군의 주도로 만주와 연해주에서 각각 활동하던 북로군정서·대한국민회·군무도독부·대한신민단·광복단·의군부 등 항일단체 6개 대표는 봉오동에서 연석회의를 열고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을 합쳐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한다.

총사령관을 최진동이 맡고 최운산은 참모장을 맡았으며, 안무는 부총사령관이 됐다. 나이도 많지만 가장 실전 경험이 많았던 홍범도는 북로제1군사령부 부장을 맡아 봉오동 전투를 치러 일제를 처단한다.

그리고 나중에 대한북로독군부는 대종교가 후원하는 서일 총재와 김좌진 사령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우당 이회영 선생 등 여섯 형제가 설립한 신흥무관학교 출신 사람들이 구성한 서로군정서(사령관, 대한제국 마지막무관생도 지청천 장군)와 합작해 청산리 전투를 치른다.

일제는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서 크게 패한 후 그해 10월 간도참변(경신참변)을 일으켰다. 모두 죽이고, 모두 빼앗고, 모두 불 지르는 일제의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대 학살이었다. 탄압을 피하고 독립운동 조직을 유지하며 단결하기 위해 항일무장투쟁 조직은 연해주 자유시로 모인다. 이른바 여기서 ‘자유시 참변’으로 알려진 자유시 사태가 발생한다.

당시 소비에트인민정부의 군대(적군)는 조선인 무장투쟁조직의 지휘권을 접수하려 했고, 이를 거부한 독립운동단체가 진압당한 사건이다. 사회주의 항일독립운동 단체 내 헤게모니 싸움까지 겹치긴 했으나,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진압했다는 주장은 낭설이다. 이때 독립군 일부가 희생됐으나 큰 규모는 아녔고, 독립군은 계속 무장투쟁을 이어간다.

안타까운 건 소비에트연방 총서기에 스탈린이 취임 한 뒤, 소련은 1937년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고 만다. 홍범도 장군도 이때 끌려간다. 그리고 카자흐스탄 어느 극장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마감하기 전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신의 벗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고 떠난다.

소설 마지막에도 나오지만 나라를 팔아먹고, 독립군을 밀고한 친일 매국노와 밀정들의 후손은 여전히 잘 살고 있다. 심지어 홍범도 장군, 지청천 장군, 김경천 장군, 이회영 장군, 이범석 장군의 동상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치워졌다. 홍범도 장군은 차라리 카자흐스탄에 묻혀 지내는 게 덜 치욕적일 것이었으리라. 범도와 백무아의 마지막 일격필살 탄환은 아직 날아가고 있다. 역사는 아직 안 끝났다. 이 소설은 그냥 소설이 아니라 철저하게 역사적인 사실과 인물을 토대로 서술한 역사 교재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