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경 인천여성회 회장

손보경 인천여성회 회장
손보경 인천여성회 회장

인천투데이|올해 여성폭력추방 주간 캠페인의 슬로건이다. 매년 11월 25일부터 12월 1일은 여성폭력추방 주간으로 여성폭력 예방과 피해자 보호를 위해 2019년 시행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 근거해 2020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11월 25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이기도 하다.

여성폭력추방 주간은 여성폭력 없는 사회를 위해 여성폭력방지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간으로 성폭력추방주간, 가정폭력추방주간을 통합해 운영하고 있다.

11월 25일을 전후해 곳곳에서 여성폭력추방 주간을 맞아 기념식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가 열릴 것이다. 여성폭력 방지와 피해자 보호 지원이 국가의 책임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미 이루어졌고 이를 위해 여성가족부는 매년 예산을 편성해 여성폭력 방지와 피해자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여성폭력 방지와 폭력 피해자 지원 관련 예산 142억원을 삭감한 2024년 여성가족부 예산안을 의결했다. 여성가족부는 1조7135억원 규모의 2024년 예산이 ‘약자복지·저출산 대응에 집중투자 하는 예산’이라고 밝혔다.

국가가 말하는 ‘약자복지’에 여성폭력 피해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삭감된 여성폭력 방지 및 폭력 피해자 지원 관련 예산 142억원은 일반 예산과 양성평등기금 예산의 삭감액 431억원 중 33%의 비율을 차지한다.여성가족부는 지출구조 혁신을 통한 사업 효율화에 중점을 뒀다며 예산 삭감 이유를 밝혔다.

정부가 발표한 2024년도 여성가족부 예산안 총액은 올해 예산(1조5678억원) 대비 9.4% 증액한 1조7135억원이다.

여가부 예산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한부모가족 지원, 아이돌봄원, 다문화가족 지원예산 등 저출산 대응 목적의 가족정책 예산만 16.6% 늘어났을 뿐, 양성평등 정책 예산은 2.5% 줄었고 “여가부가 여성단체에 무차별 지원한다”라는 여당 측 비판으로 인해 민간단체 보조사업도 폐지됐다.

청소년정책 예산 역시 6.9% 줄었다. 현 정부의 성인지 관점이 어떠한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예산안 편성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공약으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세웠다. 구조적 성차별은 더 이상 없다며 여성정책을 펼치는 여성가족부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부처 폐지와 함께 ‘양성평등’을 강조하며 “양성평등 실현의 핵심은 여성의 사회진출을 적극 돕는 것”이라던 윤 대통령과 “양성평등 일자리 기반을 확충하는 데 정책역량을 집중하겠다”라고 거듭 밝혀온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에게 묻고 싶다.

양성평등 정책 예산을 줄이면 양성평등 조직 문화 조성, 여성 사회진출 확대 등 성 불균형 해소를 위한 사업들의 비중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양성평등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지난 10월 30일 여성폭력 방지와 피해자 지원예산 감축 철회 촉구 기자회견이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열렸다. 전국 573개 단체가 연대하여 구성한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예산 감축 철회 촉구 공동행동’과 이에 동참하는 국회의원들이 공동으로 주최했고 이에 앞서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예산 감축을 막기 위한 1만 시민 선언’을 진행했다.

정부의 일방적인 지원예산 삭감은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외면하고, 실질적 피해자 지원을 불가능하게 만들 우리 사회의 성평등 퇴보임을 명백히 밝히며 예산 감축 철회를 촉구했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사회적 약자 지원 정책을 강화하겠다며 가정폭력, 디지털 성범죄 등 5대 폭력에 관한 피해자 보호와 지원 강화를 국정과제로 설정했으나 동시에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과 성평등 정책을 총괄하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와 성평등 정책 강화를 위한 범시민사회의 공동행동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부처 폐지를 막아내긴 했으나 효율성을 운운하며 “유사·중복 사업은 통폐합돼야 한다”라며 예산 감축으로 여성가족부와 관련 정책을 무력화하려 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성범죄예방교육 콘텐츠 제작, 디지털 성범죄 특화프로그램 운영, 성희롱·성폭력, 가정폭력, 이주여성 폭력피해, 북한이탈여성 폭력피해 예방을 위한 인식 개선과 홍보 예산을 모두 삭감했다. 폭력 재발 방지와 폭력에 대한 전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기 위한 예산이 모조리 사라진 것이다.

예산은 국가의 정책 방향을 보여주는 데이터이다. 2024년도 여성가족부 예산안은 현 정부의 성평등 정책 방향을 여실히 보여주며 그동안 노력하며 일궈온 성평등 사회를 퇴보시키는 예산이다.

실적과 효율을 운운하며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예산뿐만 아니라 성인권 교육사업 예산, 청소년활동 지원예산, 고용평등상담실 운영 예산 등 성평등 관련 예산을 전액 또는 일부 삭감하며 성평등 정책의 퇴행을 넘어 아예 삭제하고 있다.

실질적인 예산의 절댓값을 줄이면서 사업의 효율화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거미도 줄을 쳐야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이 있다. 현 정부에 성평등 정책 강화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실질적이고 효율적으로 여성 폭력을 방지하고 피해자를 지원하겠다면 우선 예산부터 편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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