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민애집·남양주 여유당·논산 명재고택·함양 일두고택·구례 운조루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인천시 중구 신포로 39번길 74에 위치한 ‘인천시민애(愛)집’은 인천시 등록문화재 제1호이자, 구한말 열강들의 조계지였던 송학동 1가의 역사가 담겨있는 문화 공간이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다

이곳은 개항기 독일 영사관 시설로 공개 경매로 불하됐다. 오랜 시간 독일 제물포 무역상사 세창양행으로 활용됐고, 광복 이후 레스토랑이나 사교장 또는 인천 예악인(예법과 음악)들의 문화적 거점지로 쓰였다. 그리고 1966년 인천시에서 시설을 매입해 1967년 김해두 경기도 인천시장부터 2001년 최기선 시장까지 시장 관사로 사용했다.

인천시민애집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인천시민애집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2001년부터는 역사자료관으로 활용하다가 인천이 경기도로부터 독립한 지 40주년이 되는 2021년 7월 1일, 관내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개방했다.

인천시민애집은 크게 세 공간이 있다. 관사동이었던 한옥건물을 ‘1883모던하우스’, 앞마당과 정원을 포함한 ‘제물포 정원’, 경비동 건물인 ‘역사전망대’로 나뉜다. 건물들에는 일본식 가옥과 시장관사로 쓰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인천시장들이 머물었던 1883모던하우스는 일본식 가옥을 허문 자리에 근대식 한옥을 지어 완성했다. 건물의 기초가 되는 부분은 남기고 외관을 변형한 ‘ㄷ 자형’ 한옥이다. 양쪽 날개는 각각 사랑채와 안채, 가운데 튀어나온 부분이 대청마루 역할을 했다. 나무 창틀에 커다란 유리창을 달아 실내에서도 정원의 풍경을 느낄 수 있다. 관사로 쓰일 때 사랑채는 집무실이었고, 대청마루에서는 가끔씩 행사나 연회를 열었다.

모던하우스 본관동 (사진제공 인천시민애집)
모던하우스 본관동 (사진제공 인천시민애집)

현관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사랑채, 오른쪽으로 대청마루와 디지털갤러리, 랜디스다원, 왼쪽으로 사랑채가 마주한다. 사랑채쉼터는 유리창 너머로 정원의 풍경을 담고 있다.

1883모던하우스의 가장 깊숙한 곳은 랜디스다원이다. 이 공간은 당시 선교사로 한국에 와 많은 사람들을 돌본, ‘한국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엘리 바 랜디스(Eli B. Landis)을 기리며 지은 이름이다. 이 곳은 시장 관사 시기 안채로 쓰여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복도 역사회랑에서는 인천을 거쳐 간 많은 인물을 포함해 개항기에서 현대까지의 인천 역사를 알 수 있다.

제물포정원은 1883모던하우스를 감싸고 있다. 공간의 용도가 계속 바뀌었음에도 정원에는 일본식 저택 모습이 남았다. 경사도를 고려해 수직적으로 설계했고, 큼지막한 바위로 계단과 주변을 꾸몄다. 바위를 끌어안은 나무뿌리가 정원의 세월을 짐작케 한다. 넓은 마당에서 야외 행사도 개최한다. 마당 뒤에 굳게 닫힌 철문은 과거 방공호로 사용한 곳이다.

제물포정원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제물포정원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역사전망대는 인천항과 주변의 풍경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역사전망대 내부는 1883모던하우스와 인근 제물포 구락부를 보조하는 전시관 역할을 하며 다양한 전시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역사전망대에서 바라 본 풍경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역사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이외에도 인천시민애집 주변은 개항기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많다. 국내 곳곳에서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이 모여 있는 한국근대문학관과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 전시관이 근현대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구한말 격동의 개항기 시절부터 현대까지, 지난 역사의 은은한 향기를 맡고 싶다면 인천시민애집에 방문해 보는 건 어떨까.

정약용이 나고 자란 ‘남양주 여유당’

다산 정약용은 경기도 남양주 조안면에서 태어나 자랐다. 이곳에 그의 숨결이 서린 여유당이 있다. 정조가 1800년에 승하하자, 정약용은 고향으로 내려가 사랑채에 여유당(與猶堂) 현판을 걸었다. 여유는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라’는 뜻이며 다산은 조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18년 동안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정약용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여유당에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을 저술했다.

남양주 여유당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남양주 여유당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정약용의 생가는 대홍수가 발생한 1925년에 떠내려갔다가 1986년에 다시 세워졌다.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되며, 다산의 성품처럼 소박하다. 여유당 뒤 언덕에 정약용선생묘(경기기념물)가, 언덕 아래 선생이 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있다.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논산 명재고택

충남 논산 명재고택(국가민속문화재)은 평생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후대 교육에 전념한 조선 대학자 명재 윤증의 집이다. 고택은 안채와 광채(곳간채),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된다. 보존 상태가 양호해 조선 양반 주택의 가치에 실용성과 과학적 원리가 돋보인다. 미닫이와 여닫이 기능을 합친 안고지기를 활용한 사랑채, 일조량과 바람의 이동을 고려한 안채와 광채 배치 등 선조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논산 명재고택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논산 명재고택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정여창 가문의 역사, 함양 일두고택

두고택(국가민속문화재)은 일두 정여창의 집이다. 성리학의 대가 정여창은 동방오현에 오른 유학자로 평가받는다. 지금 남은 고택은 정여창이 세상을 뜨고 약 1세기가 지나 건축했다. 입구 솟을대문에 정여창 가문이 나라에서 받은 정려 5개가 있다. 사랑채에는 정여창의 후손이 사는 집이란 사실을 말해주는 문헌세가(文獻世家) 편액이 걸렸고, 그 뒤 방문 위에는 충효절의(忠孝節義)라고 커다랗게 쓴 종이가 붙었다.

함양 일두고택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함양 일두고택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누마루에서는 마당에 조성한 석가산(石假山) 풍경이 보인다. 이곳 천장 모서리에도 탁청재(濯淸齋) 편액이 걸렸다. ‘탁한 마음을 깨끗이 씻는 집’이란 뜻이다. 사랑채 옆으로 난 일각문을 지나면 여성의 공간인 안채로 연결되고, 곡간과 정여창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차례로 나온다.

전남 구례의 평온한 집, 구례 운조루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을 담은 운조루(雲鳥樓, 국가민속문화재)는 전통가옥의 멋이 느껴지는 고택이다. 1776년(영조 52) 류이주가 낙안군수를 지낼 때 지은 집이며 250년 가까이 잘 보존된 외관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류씨 집안은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새긴 뒤주에 쌀을 채워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이 가져가게 했다

구례 운조루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구례 운조루 (사진제공 한국관광공사)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사당, 연지로 구성된 고택은 규모가 크지만, 화려한 장식 없이 소박하다. 사랑채 누마루는 문인들이 풍류를 즐긴 곳이다. 수분실(隨分室)이라는 현판을 걸어 절제 있는 삶을 지향하고, 굴뚝은 낮게 만들어 이웃을 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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