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책 읽기 금지’ 흐름과 관련해서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왜 어떤 것은 ‘금지’되는가. 위험한 것 그러므로 차단돼야 하는 것이 ‘금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금지라는 행위는 반드시 윤리적 혹은 도덕적 선(善)을 ‘위해’ 설정되고 수행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에 접근하지 못하게 규율화해 그것을 향유하는 것을 ‘막는 것’, 그럼으로써 특정한 행위가 더는 생산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타인의 행위성을 제한하는 것을 권력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특정 집단이 그 자신의 이익과 맞지 않거나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도모되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금지됨으로써 접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그 대상이 꼭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을 나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특정 행위를 차단하려고 하는 이면의 의도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금지와 통제는 이런 매커니즘 속에서 하나로 묶여 움직이곤 한다. 위험한 것으로 규정해 접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행위자의 수행성을 통제한다.

행위성을 제한해 개개인을 구속하기 쉬운 형태로 위치시키려는 ‘금지’의 역사를 거듭 되돌아보면서 금지 행위에 대한 권력적 지향을 경계하고자 하는 오늘날 시민 사회의 움직임이 유효한 까닭이다.

최근 한국 정부의 책과 독서 문화 관련 ‘금지’ 늘어

최근 한국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금지’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특히 이러한 금지의 행보가 주로 책과 독서 문화와 관련됐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를 테면 성평등과 성교육 나아가 젠더 감수성과 관련한 책들의 열람을 제한하게 조치하는 ‘금서 목록’ 관련 공문이 문제가 된 사례라든지, ‘국민독서문화 증진사업’을 통째로 삭제하고 지역 문화 시설을 기반으로 한 책 읽기 독려 사업 등을 114억원 규모에서 12억원으로 10분의1 규모로 대폭 축소시킨 정부 예산안 편성이 그렇다.

세간에선 ‘금서 읽기 캠페인’으로 이와 같은 정부의 방침에 반대하는 운동을 추진하거나, “책 읽지 말라는 정부”라며 비판의 소리를 높이고 있다.

곰곰이 따져보자. 정부는 무엇을 ‘금지’하고 싶은 것일까. 어쩌면 왜, 책을 읽어야 하는 거냐는 물음의 다른 형태일 수 있을 이 질문은, 책으로 증진하고자 하는 것을 막고자 하려는 것이 뭐냐는 것임에, 우리가 책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냐는 것으로 돌아나오는 것이기도 할 테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왜 금지돼야 하는가.

인천독서대전 행사에서 들었던 질문과 답

며칠 전 마무리된 여름내내 진행했던 인천독서대전 행사에서 들었던 한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답변이 될 것 같다. 진행자로 참여했던 첫 시집 북토크 행사에서 한 독자가 물었다. “특히나 요즘 시는 어렵다는 이야기도 많잖아요. 그런데 왜 시를 읽어야 할까요”

시인과 나와 현장에 온 여러 사람들은 저마다 고민에 빠졌다. 이것을 시 혹은 문학의 위기와 관련한 질문으로 독해할 것인지, 아니면 시 읽기의 유용 또흔 무용함에 따른 가치의 문제로 이해할 것인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우리는 뭔가 어렵고 까다로운 것을 ‘읽는가’하는 문제로 볼지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질 것 같았다.

질문의 맥락은 가장 마지막 의미에 가까워 보였다. 질문자에게 답을 청해 듣기로 ‘어렵지만, (어려운) 시를 읽는 일은 곧 사람을 경험하는 일’과 유사한 것 같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사람도 자기 뜻대로 독해가 잘 안되고 이해가 잘 안되서 경험해야만 하는 존재인 것처럼 어려운 시도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내 식대로 거듭 풀어보자면 이렇다. 어려운 시를 뜯어보는 일은 경제적인 활동과는 거리가 멀다. 누군가가 펼쳐놓은 세계에 대한 전망과 시선을 뜯어보는 일은 일단 시간이 많이 든다.

타인의 표현(심지어 문자로 된)을 이해해야 하고, 자기 관점으로 번역한 그 표현에 자신의 경험 또한 비춰봐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수두룩하게 맞이해야 한다.

그렇게 시간을 들인 결과 대단하게 뭔가가 남느냐고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가령 어려운 시집을 시간을 들여 읽고 나면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이득’을 보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렵고 까다로운 독서(시 읽기)는 비경제적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의 핵심이다. 우리는 타인은커녕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조차 모른다(그러므로 자기 자신 또한 일종의 타인이기도 하다).

타인이란 대체로 미지의 영역이고 장악되지 않으며, 그렇기에 오랜 시간을 들여 면밀히 관찰해야 겨우 이해할 만한 단서를 겨우 잡을 수 있는 좀체 파악되지 않는 존재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운’ 타인 들여다보기를 통해 타인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본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기회를 축소시키는 ‘금지’

타인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해보려고 하는 나, 나와 타인 그 자체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골몰하는 자신. 이러한 존재의 모습이 이 어려운 ‘읽기’의 행위에 비춰진다. 그런 의미에서 어려운, 시, 읽기는 사람을 대하는 일과 비슷하고, 나아가 우리가 다른 존재를 헤아리고 공존할 수 있는 방식을 체험하는 일과도 비슷하다.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의 목록을 만들어 읽기를 제한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게 장려하는 문화 사업을 없애고 공공의 차원에서 뒷받침하는 예산을 줄여 산업 규모를 축소시키는 일은, 이제 그저 활동의 범주를 줄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기회를 축소시킴으로써 인간에 대한 성찰을 ‘금지’하는 것이고, 나아가 공존하는 삶에 대한 상상력을 ‘금지’하는 것이다. 그러니 최근의 책 읽기에 대한 여러 방식의 금지 조처는, 인간성을 금지하고 통제하는 것은 아닌지 되묻는다.

며칠 전 북토크에 참여한 10명 남짓의, ‘왜 어려운 시를 읽어야 할까요’ 하는 질문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 질문을 생각해보기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삶을 살게 됐을지도 모른다.

‘언어’를 이해하는 까다로운 행위를 기꺼이 경험함으로써, 마찬가지로 ‘어려운’ 사는 일에 대한 다른 관점을 경유해보는 것. 며칠 전 그 자리에서 우리가 겪었던 일은, 또 이 글로 그 질문을 나누게 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리라.

그런데 정부의 방침대로라면 지역 사회에 기초해 독서를 장려하는 이 문화 행사도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며칠 전의 경험으로, 또 누군가는 이 글을 읽은 경험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나은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더 이상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러니 보라. 이제 ‘책 읽기 금지’에 대한 우려는 더 이상 ‘나’ 아닌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