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정수의 알쓸신서 ⑩ 텀블러로 지구를 구한다는 농담

알렉산더 폰 쇤베르크|이상희 옮김|추수밭|2023년

인천투데이=변정수 도서평론가|얼마 전, ‘지구의 날’을 맞아 10분 동안 집안의 모든 전등을 끄는 소등 행사에 참여해 달라는 요란스런 홍보를 마주하고 실소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만일 10분이 아니라 단 1초라도 모든 공장의 전원을 내리자고 했더라도 그리 시큰둥하게 반응했을지는 모르겠다. 요컨대 그 행사가 많은 시민들의 참여로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들 지구의 환경에 실질적으로 얼마나 보탬이 되는 일인지 아리송하더라는 것이다.

적잖은 이들에게 지구를 위해 뭔가 실천하고 있다는 뿌듯한 기분을 안겨주기는 할 테지만, 단지 1회성의 상징적인 행사라 해도 문제의 본질에 더 다가가면서도 훨씬 실효성이 있는 실천 방법은 왜 떠올리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작은 실천’에조차 무관심한 사람이 그보다 더 대단한 실천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실제로는 큰 의미가 없는 아주 사소한 실천이라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경험을 통해 문제의식을 환기하는 소중한 계기가 마련될 수만 있어도 매우 바람직한 일일 터이다. 가령 ‘10분 동안 전등을 끌 일이 아니라 1초라도 공장의 전원을 내리면 어떨까’ 같은 발상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로서라면 의미가 아주 없지만은 않을 게다.

하지만 그 작은 실천에 기꺼이 참여한 이들 가운데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는 사람들은 기실 극소수일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은 10분 동안의 경건한 의식을 치른 뒤 아무렇지도 않게 온통 지구를 괴롭히는 이들로 가득찬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어쩌면 그러기 위한 일종의 심리적 면죄부로서 흔히 작은 실천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들을 ‘소비’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역설이 ‘헛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우아하게 지구를 지키는 법’이라는 긴 부제가 붙은 이 책이 신랄하게 겨냥하는 지점이다.

가령 문신용 잉크에 발암물질로 알려진 ‘다환 방향족 탄화수소’가 들어 있음을 지적하며 “유기농 식품을 고집하면서 문신을 하는 것은 마약을 흡입하면서 강황의 항산화효과를 떠들어대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비꼬거나, 스마트폰을 제조하는 데도 또한 스마트폰을 이용해 데이터를 검색하는 과정에서도 적잖은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는 점을 환기하며 “스마트폰 이용자들(결국 우리 모두)이 환경을 중시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아 장신구를 목에 걸고 동물보호에 앞장서는 꼴이나 마찬가지”라고 꼬집는 식이다.

그렇다고 이 유쾌한 저자가 환경 위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지구를 구하려는 노력들에 냉소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 주제에 관한 저자의 통찰은 “녹색 각성에 담긴 역설은, 원래 울트라 자유주의에 기원을 둔 급진적인 저항운동에서 출발했음에도 줄곧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라는 말에서 가장 명징하게 드러난다.

달리 말해 저자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녹색 실천 자체가 아니라 종교적인 금욕주의에 가까울 만큼 교조화되고 경직된 실천 담론을 유행처럼 소비하는 중산층의 위선이다.

이 점은 이 책의 원제 ‘녹색 쾌락주의자(Der grüne Hedonist)’에도 충실히 반영돼있다. 물론 지구를 위한 모든 실천은 조금이라도 욕망을 절제하고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다.

그러나 실은 그럴 마음이 그다지 없는 탓에, 짐짓 그러는 시늉이라도 하는 작은 실천들이 위선의 혐의를 피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오히려 욕망의 방향을 바꿔 지금까지와는 ‘다른’ 욕망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더 환경친화적인 삶의 조건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따라서 식습관부터 패션감각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이 책에서 권하는 실천 방법을 그야말로 금욕적으로 실천할 의지를 다지는 것이야말로 이 책이 비판해 마지않는 행태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일이다.

어떤 음식이 더 맛있는지, 어떤 옷이 더 멋있는지, 어떤 여행이 더 즐거운지 따위의 기준 자체를 반성적으로 조정하고 전환해 보자는 데 저자의 참뜻이 있을 터이다.

*알쓸신서는 알아두면 쓸데있는 신비한 서적 이야기의 줄임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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