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위공(송도·여의도) 박병언 대표 변호사

인천투데이ㅣ김대중 정부 시기 국정원 원장을 역임한 임동원은 1934년생이다. 압록강가 산골인 평안북도 위원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4 후퇴 때 그는 피란민대열을 따라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의 나이 17세 때다.

박병언 법무법인 위공(송도)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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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거의 유리걸식을 하며 곧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기적적으로 길가에서 만난 미군 하사가 미군 병기창에서 잡무를 하게 해준 덕에 생존했다. 임동원은 미군에서 잡무를 하는 틈틈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했다. 1년만인 1952년 육국사관학교에 합격했다.

육사는 임동원의 학습능력을 높게 평가했는지, 그를 서울대학교에 파견해 군사학 외 인문학 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렇게 그는 1961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다. 이제는 육사 출신 중 공부를 꽤나 한 사람 중 한 명이 된 그는, 1964년에 미군 특수전학교로 군사유학까지 떠나게 된다.

굶어 죽은 사람들이 주변에 보이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당시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100달러 였다)에서, 일하지 않고 공부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자 특별한 기회였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한 인재가 적은 나라였기 때문에, 공부한 자들은 예외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게 마땅했다.

육군사관학교는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곳이기는 하지만, 1960년대를 기준으로 보면 대한민국의 엘리트들이 집결하는 곳 중 하나였다.

그리고 육군사관학교의 생도를 가르치는 교수 요원 역시 당대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고 할 수 있다. 임동원은 미국 군사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육군사관학교의 교수로 임용 돼 1969년까지 생도들을 가르쳤다.

임동원이 육사에서 생도들을 가르치던 시기, 같은 육사 교수 중에 경제학을 담당한 교수가 신영복 선생이다. 신영복 선생은 1941년 생으로, 임동원 전 원장보다 8년 아래다. 신영복 선생 역시 1960년대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숙명여대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임용됐다.

육사에서 함께 생도들을 가르치던 두 사람의 이후의 행보는 크게 갈린다. 임동원은 계속 군인으로 복무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에 찬성하지 않는 군인으로 분류돼 강제로 예편되게 된다(임동원, 피스메이커 121면).

그 후 그는 나이지리아 대사 등을 거쳐 김대중 정부의 국정원 원장으로 발탁돼 전 세계를 감동시킨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실무 책임자가 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일로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신영복 선생은 1968년 '통일혁명당'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했다. 그는 1988년에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그는 감옥에서 절망하지 않았다. 감옥을 하나의 학교로, 감옥에서 만난 다종다양한 죄수들을 자신의 선생으로 삼아 '관계론'이라는 하나의 사상을 전개한다.

그리고 감옥에서 교도소 내 교화활동 일환으로 소개 받은 붓글씨 선생들과 교류를 통해 붓글씨를 배운다. 이후 그간 공부한 한문 붓글씨에 어머니의 민중적 필기체를 독창적으로 결합해 사람들이 모두 아는 아름다운 한글 서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말년에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여러 강의와 저술 활동을 펼쳤다.

임동원은 보수적인 군인 출신이다. 그가 미국 유학 과정에서 공부하고 육사에서 강의한 내용도 공산주의 혁명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전술에 대한 것이다.

그런 임동원이 말년에 민주당 정부의 국정원 원장이 되어 역사적인 2000년 6.15 남북 정상 공동선언을 성사시켜냈다.

신영복은 젊은 시절 급진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하다 감옥에 갇히게 됐으나, 정신적으론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그 경험을 보편적인 인간 성장의 이론으로 승화시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임동원 전 원장이나 신영복 선생이나 모두 대한민국의 인재들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할 마음이 가득했다.

임동원을 단지 군인 출신의 보수적인 육사 교수로만 생각한다면, 그가 1960년 4.19 혁명을 서울대에서 맞으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던 점을 놓칠 수도 있다.

결국 이런 임동원의 마음은 1980년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신영복 역시 혁명적 방식으로 국가를 전복하려던 좌익인사로만 평가하면, 그가 급진적 방법론을 반성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개인 간 관계회복을 위해 노력한 위대한 사상가였다는 역량을 휘발시키게 된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을 '추월'하기만 하면 되던 시기는 이미 끝났다. 우리는 이제 백인들 중에서만 위인을 찾던 습관에서 벗어나, 우리 내부에 있던 위인들을 다시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인들을 좌-우 진영 논리의 관점으로만 평가하면, 식민지-분단-전쟁-독재를 거쳐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른 한국에서 제대로 평가받을 인물은 거의 없을 수밖에 없다.

우리 스스로가 냉전의 안경을 벗어야 할 이때, 안타깝게도 윤석열 대통령은 대한민국 내에 '반국가세력'있다며 이들을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023.6.28. 자유총연맹 행사 발언).

윤석열 대통령의 주장대로 분류하면, 임동원 전 국정원 원장 조차 북한에 놀아난 반국가 세력이 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주장대로 해서는, 진정한 이 나라의 역량을 끌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라의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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