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동희 극작가
K형에게 씁니다.

먼저 차 한 잔, 술 한 잔도 함께 나누지 않은 K형에게 대뜸 이런 글을 쓴다는 게 거북스럽지만, K형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에두름 없이 저속하고 황망한 소리들을 거칠게 퍼부었으므로 그다지 큰 부담을 느끼진 않습니다. 다만, 얼굴 한 번 대한 적 없는 K형과의 관계가 좀 더 너그러웠으면 하는 아쉬움은 크게 남습니다.

글로나마 초면에 형(兄)이라 부르는 건 단순히 K형이 세상을 먼저 살아온 때문이고, 그 이상의 존칭을 붙일 명분을 찾지 못한 데다, 그 이하의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부르기에는 자칫 K형의 저속한 말투를 따르는 꼴이 될까를 염려하는 까닭입니다.

K형,
K형을 알게 된지도 벌써 삼십년 가까운 시간이 지납니다. 나름 작가를 꿈꾸던 이십대의 문학도에게 K형은 정말로 큰 산이었습니다. 그 어떤 위협에도 주저함이나 굽힘이 없이 당당하던 K형을 문학써클 선배들은 마치 우상처럼 떠받들면서 신화인양 들려주었고, 나도 후배들에게 그렇게 전했습니다.

세상의 때를 묻히지 않은, 다듬어지지 않은 문학도들은 K형을 마치 작가의 전형인양 받들었고, K형의 새로운 글을 먼저 읽는 사람은 무슨 횡재라도 한 듯이 득의양양하게 나름의 해석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넋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사뭇 진진했던 것만은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K형,
시간은 많은 걸 변하게 하는가봅니다. 세상이 바뀌고 거기에 묻혀 사는 사람도 달라지기 마련이겠지요. K형의 말대로 말입니다. 문학도를 열망하던 이들이 다른 삶의 방편을 찾아 헤어지기도 했고, 우리에겐 보배롭기만 하던 K형의 글도 일반 독자나 예비 작가들에게 더 이상 신성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인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K형의 글이나 말에 대한 이야기가 글줄이나 읽는 사람들의 열띤 토론의, 혹은 새로운 배움의 모범으로서 오르내린다면 좋았으련만 술자리에서 내뱉는 세상살이의 한탄 속에 안줏감이 되어버린 현실은 너무나 서글픕니다. 세상의 변화라는 핑계를 대고 K형을 이해하기에는 내 마음이 그렇게까지는 너그럽지가 못하다는 걸 밝힙니다.

몇 해 전에 K형과 관련한 문학계의 설왕설래를 접하면서도 그저 서로 다른 입장이거나 동년배들 사이에서 서운한 일이었거나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사정이 있으려니 하는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아니었나 봅니다. 요즘에 듣는 K형에 대한 이야기들, 아니 굳이 남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K형이 신문이나 방송에서 직접 한 말들은 내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하고도 남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만큼의 놀라운 변신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입니다. 그리고 놀라움 이상의 실망을 거쳐 이젠 연민을 느낍니다.

K형,
차라리 K형이 처음부터 야비하게 살아온 인물이라면, 아니면 이전의 삶은 이러하였으나 지금부터 달리 살겠노라 구차한 변명이라도 덧붙였더라면 나 같은 한낱 범부가 실망하거나 연민 따위를 들먹일 아무런 까닭이 없겠지요. 우리에게 신화였던 그 때처럼 통렬한 자기반성이라도 있었더라면, 아니 알량한 반성문이라도 고백하고 드러냈더라면 K형의 변신에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게 뭡니까? 같은 시대를 함께 걸어온 이들에게 K형이 그토록 악다구니를 부리다니요. 한때 동지라던 이들에게, 선후배들에게, 절반의 국민들에게 쌍스러운 저주의 말을 서슴없이 쏟아내다니요. 게다가 K형의 입을 막으려던 정권에서 쓰던 수법 그대로를 부끄러움도, 거침도 없이 해대다니요.

K형.
이젠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아니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절대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고 분명한 경계를 그어 놓습니다. 천만 다행인 것은 K형이라는 우상을 내가 불순하게 파괴한 것이 아니라, 우상 스스로 부서져버린 게 참으로 천만다행입니다. 이제는 K형의 시(詩)들, 아니 K형을 망설임 없이 버립니다. 그런다고 K형이 달라질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좀 홀가분할 거 같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더 이상은 K형의 말과 글, 얼굴조차 우연이라도 마주하지 않게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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