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열 전국금속노동조합 감사위원
1931년 5월 29일 평양 고무공장 노동조합 지도자인 강주룡씨가 을밀대 지붕 위에서 농성한 것이 우리나라 노동자 고공농성의 최초라고 알고 있다. 일제강점기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과 저임금 등에 항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 후 80년이 지난 지금도 노동자들은 고공농성을 멈추지 않고 있다. 탄압의 양상은 그때와 다르지만 노동자들이 느끼는 고통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할 수 있다.

1987년 이후 노동기본권 보장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10년 뒤인 1997년 노동법 날치기 이후 다시 후퇴했고, 현재의 임금 등 노동조건은 물가인상 등을 고려할 때 90년대 만족도보다 현저히 떨어졌다. 노동자 가족이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 엄청나게 늘어난 반면, 노동자의 임금이나 복지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뿐만 아니다. 노동의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정리해고를 맘대로 할 수 있게 하면서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고용불안에 떨고 있다. 비정규직이 넘쳐나면서 사회양극화가 심화됐다.

2001년 대우자동차 1751명 정리해고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등은 이미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이었다. 아무런 사회적 보장도 없이 길거리로 내쫒긴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 내몰린 격이 됐다. 그들 중 상당수가 상실감에, 경쟁사회의 냉혹함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야만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 23명이 죽음을 선택했고, 최근 들어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와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 노동자가 목숨을 끊었다. 비정규직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 극심한 노동탄압 등,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유는 다양하다. 자본의 이윤에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얽혀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증폭한다.

게다가 이런 사회 양극화 문제에 ‘노동 양극화’ 문제까지 겹쳐, 지금 노동현실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라 할 수 있다. 눈과 귀를 막은 보수언론 탓도 있지만, 자본은 자본대로 정치는 정치대로 한패가 돼 노동자들의 권리를 짓밟고 탄압하고 있다. 결국 노동자들이 고공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쪽만 주시하는 기득권 세력의 사고와 시선이 문제

이 같은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18대 대통령선거는 보수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지금까지 그들이 펼쳐온 정책들을 보면, 노동자와 서민이 대통령 당선자에게 기대할 것은 없다. 오히려 17대 대통령 때보다 후퇴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선거 과정에서 대통령 당선자도 ‘경제민주화’를 언급했다. 문제는 경제민주화를 바라보는 입장과 태도이다.

정치권력 장악을 연장하고 자본의 이윤 극대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경제민주화를 실행할 순 없다. 이러한 본질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해야하는 이른바 지식인의 다수 시선도 한쪽만 바라보고 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미 정치권력을 좆고 있는 언론의 행보는 노동자와 서민의 의식을 지배하려할 뿐이다. 빈곤과 불평등으로 신음하는 노동자와 서민의 현실을 오히려 감추고 축소하거나 포장하기 바쁘다.
이렇게 편향된 사고와 시선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한 다수 국민의 알 권리는 보장받을 수 없다. 그 결과가 이번 대선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2013년 새해가 밝았지만, 노동자와 서민의 삶은 궁핍하고 다수 노동자가 벼랑 끝에 서 있다. 이제부터라도 불안에 떨지 않고 노동할 수 있는 고용안정과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바라는 노동자들의 소박한 요구에 귀를 열고 공정한 시선으로 봐야한다.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 때 눈과 귀를 두 개씩 만든 것은 어느 한쪽만 보거나 듣지 말라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공정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노동자와 서민의 신음소리를 여과 없이 들어야한다.

노동자와 서민은 기업과 정권의 존재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희생양이 아니라, 공존해야할 사회 구성 주체이다. 성장과 분배, 집권과 지배라는 논리의 들러리가 아니라 사회 발전을 이끄는 하나의 주체이다.

이제는 더 이상 노동자들이 엄동설한에 고공을 선택하고 죽음이라는 극단을 선택하지 않도록 정부와 기업이 적극 나서야한다. 그것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가 공약한 국민대통합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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