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대 교수의 전통문화 기웃거리기] ④

인천투데이=서영대 교수|대학 신입생 시절, 친구들과 산에 갔다가 공동묘지 옆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아 사물의 형체는 대충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그때 긴 머리에 흰 옷을 입고 큰 나무에 기대어 있는 젊은 여성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 순간 우리 모두는 잠시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나 약간 정신이 돌아오면서 그 여성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물러났던 기억이 있다.

인천 서구 한 공동묘지구역의 일부 모습.(출처 구글맵 스트리트뷰)
인천 서구 한 공동묘지구역의 일부 모습.(출처 구글맵 스트리트뷰)

우리가 그토록 기겁을 했던 것은 그 여성을 귀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 큰 남자 녀석들이면서도 그 여성의 정체를 밝혀 보려고는 감히 생각조차 못하고 꽁무니 빼기에 바빴던 만큼, 그 여성이 귀신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귀신이라 믿었던 것은 우리의 뇌리 속에 귀신은 산발에 소복을 하고 생전의 원한 해결을 위해 무서운 모습으로, 무덤이나 흉가 등에 출몰하는 여성인데, 그 여성은 귀신의 전형과 상당 부분 부합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기록을 소급해 보면, 처음부터 귀신이 이런 식으로 정형화 내지 기호화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귀신관이 시대에 따라 변화해 온 결과가 이것이란 것이다.

귀신에 대한 관념은 선사시대부터 이미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자료의 부족으로 짐작하기 어렵다. 반면 신라시대로 오면, 귀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들이 나타난다.

신라시대 나타난 귀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들 

예컨대 신라 25대 진지왕은 생전에 도화녀란 미인을 차지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죽은 지 2년 후에 평상시처럼 도화녀 앞에 나타나 사랑을 이루었고 그 결과 비형랑이 태어났다고 한다(이것이 귀태이다).

또 최항이란 청년은 부모의 반대로 애첩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지만, 8일 후 애첩을 찾아와 부모의 허락을 얻었으니 같이 본가에 가자고 했는데, 애첩은 그가 죽은 사람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밖에 당나라 구원군을 애타게 기다리는 무열왕 앞에 전사한 장춘랑과 파랑의 혼령이 나타나 내년 5월에 당군이 출발할 것임을 알려주었다는 전승도 있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신라의 귀신이란 성별로는 모두 남자들이고, 모습은 죽은 사람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생전 그대로이며, 출현 목적은 못다 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이거나 산 자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귀신관은 이들 귀신이 밤중에 나타났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귀신의 전형, 한풀이를 위해 끔찍한 형상으로 나타나는 여성(특히 처녀)과 상당히 다르다. 물론 이들 자료가 신라인의 귀신관 전부를 반영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성별·형상·출현 목적 모두 현재와 상당히 달랐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려시대 영주 부석사에 나타난 귀신

영주 부석사의 밤.(출처 부석사 홈페이지)
영주 부석사의 밤.(출처 부석사 홈페이지)

고려시대로 오면 귀신에 대한 기록이 의외로 적어, 다음 기록 정도를 찾을 수 있다. 1198년(신종 1) 이인보가 왕명을 받고 산천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경상도에 갔다가 영주 부석사에 머물렀다.

그때 자색이 뛰어난 여인이 나타나 인사를 하기에, 목사가 보낸 기생이려니 하고 3일간 동침을 했다. 뒷날 이 여인이 귀신임을 알고 후환이 두려워 헤어지고자 했더니, 귀신이 이를 먼저 눈치 채고 원망의 말을 남기면서 회오리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보한집’).

이 하나의 자료만으로는 고려시대 귀신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음은 물론이지만, 귀신인지 금방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산 사람과 구별이 안 되는 모습이라는 점은 신라 귀신관의 연장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성 귀신이 처음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귀신에 대한 두려움이 암시돼 있다는 점은 새로운 사실로서, 귀신의 전형에 한 걸음 다가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귀신관 엿볼 자료 늘어나

한편 조선시대에는 귀신관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많이 증가하는데, 편의상 이를 조선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살펴보자.

조선 전기의 자료 중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1486년(성종 17) 무렵, 호조정랑 이두(李杜)의 집에 나타난, 죽은 지 10년이나 되는 고모의 귀신이다. 이 귀신은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일일이 간섭했는데, 허리 위는 보이지 않고 하반신은 종이로 가렸는데 살이 없고 뼈만 보일 뿐이었다고 한다(‘용재총화’).

또 홍 재상이 젊은 시절 여승을 꾀어 정을 통하고 맞으러 오겠다는 약속만 하고 이를 지키지 않아 여승은 마음의 병으로 죽고 말았는데, 홍 재상이 남방절도사로 부임했을 때 여승이 뱀으로 변하여 날마다 나타나 괴롭힌 탓에 결국 홍 재상도 죽고 말았다(‘용재총화’)는 전승도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여성이 점차 귀신의 주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또 출현의 목적이 이두의 고모 귀신처럼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으나, 홍 재추 앞에 나타난 상사뱀의 경우는 배신에 따른 원한 때문이란 점이 주목된다.

원한 때문에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귀신의 전형에 더욱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한의 표현체가 인간 형상의 귀신이 아니라 뱀이란 점에서는 아직까지 귀신의 전형과 거리가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에 비해 조선 후기의 자료들은 귀신의 성격 등이 크게 변화했음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는 유명한 아랑형 설화가 있다.

조선시대 후기 아랑형 설화

밀양 아랑각에 걸려있는 아랑형 설화 그림.(출처 밀양시 홈페이지)
밀양 아랑각에 걸려있는 아랑형 설화 그림.(출처 밀양시 홈페이지)

아랑은 겁탈을 피하려다 죽임을 당한 처녀인데, 그 원혼이 밀양부사에게 나타나 자신의 복수를 부탁한다.

이때 아랑의 모습의 모습에 대해서는 “가슴에 칼을 꽂고 유혈이 낭자했으며, 큰 돌덩어리 하나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성수패설’) “온 몸에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머리를 풀고 벌거벗은 모습에 손에는 붉은 기를 들고 있었다”(‘청구야담’) “얼굴이 몹시 아름다웠고 초록 저고리ㆍ붉은 치마를 입었으며, 머리는 풀어 헤쳤는데 칼이 꽂혀 있었다”(‘교수잡사’) 등의 여러 버전이 있다.

또 아랑에 못지않게 유명한 여귀로는 장화와 홍련이 있는데, 이 자매는 1651년(효종 2) 계모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어 그 원혼이 철산부사 전동흘(全東屹)에게 나타나 신원을 부탁했다는 것이다(‘가재사실록’).

이들 자료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억울하게 죽은 젊은 여성으로 특히 처녀라는 점, 관리 앞에 출현해 자신의 신원을 부탁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또 죽을 당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아랑이 나체인 것도 강간을 당해 죽었기 때문이다), 형상이 끔찍하다는 점도 그러하다.

이에 따라 귀신에 대한 공포도 극대화됐을 것임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러한 사실들은 조선 후기의 귀신이 귀신의 전형에 거의 도달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아직 귀신의 전형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우선 산발은 했지만, 소복을 입지 않았다. 소복은 상복이란 점에서 죽은 이에게 어울리는 것 같지만, 자료에는 초록 저고리에 붉은 치마 등, 죽을 당시의 복장을 했다고 한다.

또 성격에서도 모질고 사납지 못해 자신의 원한을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 해결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귀신의 근대화’라는 주제로 추후에 다시 한번 언급하고자 한다.

자신의 신원을 위해 출몰한 조선 후기 귀신

여성 귀신이 자신의 신원을 위해 출몰한다는 데에는 사회사적 의미가 있다. 앞서 신라시대에는 여귀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으며, 고려시대에도 여귀는 나오지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여성이 등장하는 것은 조선 전기 홍 재상에게 배신당한 여승이 처음이다. 그렇지만 여승은 여성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뱀이 돼 복수를 시도한다.

이것은 여성이 여성 자신의 모습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는 것조차 공인되지 않았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여귀가, 비록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모습으로 신원을 도모한 사실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역할이 그만큼 상승되고 있음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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