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이번 학기 한 대학 수업에서 페미니즘 철학에 대해 강의했다. 가급적이면 이론을 실재에 적용해서 생각할 수 있게 현재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에 비춰 이론을 접목시키고 해석하도록 권유했다.

각 주차에 배웠던 테마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함께 고민하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어느 주차에는 ‘돌봄’에 대해서 배웠고 다른 주차에는 ‘가부장제 폭력’에 대해 배웠는데, 돌봄의 문제가 가부장제 폭력과 과연 무관한지에 대해 생각하는 식이었다.

‘가부장제 폭력’은 이른바 ‘가정 폭력’이라 언급되고 있는 가정 내 폭력을 일컫는 용어로 이성애 남성 중심적 사고를 기반으로 구축된 ‘가정’과 연관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성차별적 폭력 전반을 이른다.

이때 ‘가부장제’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까닭은 이른바 ‘가정 폭력’이 가정과 연관돼 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그 안에서 특정 성별을 억압하는 ‘가부장성’에 의한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나라마다 그 정의가 조금씩 다르기는 해도 가부장제 폭력(가정 폭력)에는 신체적·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교우 관계 제한, 경제 활동 제한, 심리적 압박 등이 포함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사유해볼 법하다.

사실 돌봄의 문제는 여성을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으로 귀속시키게끔 만드는 사회 구조와도 관련 있다. 취업 시장에서 남녀 차별이 존재하고, 임금에서 또한 성차별이 존재하며, 결혼·출산·육아의 문제가 성별에 따라 차별받는 구조가 존재하는 한, 여성은 결혼·출산·육아를 이런 외부적 조건과 무관하게 ‘가정 내’에서만 사유하기 어렵다.

인간은 누구나 돌봄을 필요로 하고 또 누구나 그 돌봄을 실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여성을 통해서 그 책임을 몰아 주기 하는 사회구조는 비단 ‘가정’ 내에서만이 아니라 그렇게 구속되게끔 만드는 사회 구조와도 연관돼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나누고 나면 어떤 학생들은 수업 종료 후 해소되지 않은 개인적인 의문을 내어놓기도 한다. 저마다의 고민에 빠져드는 시간은 수업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셈이다.

구조적인 성차별이 가정의 구성과 그 내부적인 성차별로 이어지고, 다시 말해 구제책이 내외부에서 동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한 가부장제가 양산하는 폭력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수업의 소결은, 수업의 서두에서 제시했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가정’을 옹호하고자 함에 여성 차별적인 판결이 이뤄진다는 것과, 노동 시장에서 성차별이 이루어진다는 것, 교육의 측면에서 성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 공동체를 꾸리는 문제에 있어 남성에 대한 여성 귀속적인 방식만을 합법화하고 고수하고 있다는 이 모든 것을 어떤 식으로 사유하면 좋을지.

이 모든 것에 대해 한 번의 수업에서 답을 구할 수는 없어도 이 모든 것이 얽혀있음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이때부터 문제는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다. 비로소 나와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대두되는 것이다.

돌봄과 (합법화된) (결혼) 공동체, 구조적 젠더 차별의 연관성을 이토록 길게 이야기한 까닭은 최근 기사화된 ‘방울토마토 절도 사건’을 다시 성찰하기 위해서다.

방울토마토가 먹고싶다는 6살 자녀를 위해 한 40대 여성이 가게에서 방울토마토 한 팩을 훔쳤다. 곧 출석을 통보받은 그녀는 ‘조금 먹기는 했지만 남은 방울토마토라도 돌려드리겠다’고 말했고 곧이어 사죄했다.

그녀는 최근 이혼한 뒤 홀로 아이를 양육하고 있었는데, 전남편이 양육비를 보내오지 않았으며 아파트 관리비와 임대료도 미납돼 여러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 사건을 즉결심판해 벌금 등을 부과하되 전과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나는 이 기사가 ‘애잔한 모성’의 사례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이 기사로 읽어내야 할 것은 이성애를 근간으로 한 남성 중심 공동체의 결속, 즉 이성애자 사이의 결혼과 그에 따른 ‘가정’에서 돌봄이 모조리 어머니(여성)의 몫으로 주어져있고 그에 한해 어떤 죄 또한 사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가정의 해체 이후 돌봄 문제에 있어 아버지(남성)은 배제돼있을 뿐만 아니라 자발적 배제의 책임을 사회적으로 구속하고 있지 않다. 이혼 이후 보호자 여성이 자립해 아이를 돌볼 수 있을 만한 경제적, 가정적 상황을 만들 수 있도록 전 배우자가 그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또 그렇게 하도록 사회가 어떤 구속력을 발생시키고 있는지를 함께 논해야만 한다.

우리가 이 기사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면, 그것은 방울토마토 한 팩을 훔쳤다는 사실, 출두할 때까지 불과 한 팩조차 어떤 이유로 다 먹지 못하고 되돌려주겠다고 말했다는 사실, 자녀가 먹고 싶다고 한 것을 사주지 못한 부모의 안타까움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모녀가 그러한 극한 상황에 내몰리도록 방치한 공동체의 연루자로서 전남편에 대한 돌봄의 강제력이 부재하다는 사실, 결혼 전후로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제도를 구체적으로 갖추고 실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공동체 차원의 책임감, 그럼으로써 우리가 사회적 약자(아이,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가정)에 대해 대비책 혹은 사후적 대책 또한 실질적으로 마련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한 경각심.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마음 아파해야 하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그러니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는 무엇에 마음 아파하고 있고 무엇에 마음 아파해야 하는가? 우리는 단지 개인의 여력에 ‘따라’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 어떤 상황에라도 ‘도와야만’ 하는 사람이며 그런 책임이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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