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경 인천여성회 회장

손보경 인천여성회 회장
손보경 인천여성회 회장

인천투데이|며칠 전 인천의 오랜 추억이 깃든 미림극장에서 가슴 시린 아름다운 사랑 영화 ‘깊고 오랜 사랑’을 봤다.

40년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함께 살아온 연인, 한 사람이 말기 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지만, 그 연인은 보호자로서 그 곁을 지킬 수 없었고, 마지막까지 함께 할 수 없음을 비관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났다.

사랑하는 연인이지만 아플 때 가족으로서 보호자의 역할을 할 수 없었고 그 곁을 지킬 수 없었던 이유는 주인공인 영희와 순정이 여고 동창생으로 동성애자이기 때문이었다.

중환자실에 있는 연인 순정을 만나기 위해 영희는 간호사에게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친한 친구이니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가족이 아니라며 거절당했고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죽음이었다.

40년을 가족으로 살았지만, 배우자가 아닌 친구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성 간의 혼인 관계만 법적으로 인정하는 현 제도가 얼마나 차별적인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랑하며 함께 사는 모든 관계는 가족으로 인정하고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인권과 평등의 문제이다.

5월 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이었다.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는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하기로 하고 “동성애는 판단력, 안정성, 신뢰성, 또는 직업 능력에 결함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으므로 고용, 주택, 공공장소, 자격증 등에서 동성애자에 대해 행해지는 모든 공적 및 사적 차별에 개탄하며, 그러한 판단력, 능력, 신뢰성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동성애자에게 더 많이 지워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990년 5월 17일 세계보건기구(WHO)는 국제질병분류에서 동성애를 삭제하고 성적지향은 질병이나 장애에 해당하지 않음을 명시했다.

이후 5월 17일을 세계적인 기념일로 정하고 매년 아이다호 데이(IDAHOBit-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 Transphobia and Biphobia),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로 기념한다. 2023년 주제는 ‘언제나 함께 : 다양성 속의 통합’이다.

성소수자가 직면한 혐오와 차별, 폭력을 인식하고, 모두가 존엄하고 평등한 존재임을 확인하며 성소수자와 친화적 시민들의 연대해야 한다.

성소수자가 성적 지향을 이유로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국제적으로 확립된 원칙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영역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

혼인과 혈연으로 이뤄진 관계의 이성 간 부부만을 인정하는 가족제도에서의 차별은 더욱 공고하다. 앞서 이야기한 영화 ‘깊고 오랜 사랑’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고 한다. 동성 배우자에게는 의료 결정 권한도 없었지만, 집과 재산에 대한 상속이나 분할도 가능하지 않았다.

순정이 죽기 전 영희에게 함께 살던 집을 남긴다고 했지만, 영희는 순정의 가족들에 의해 집에서 쫓겨난다.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동성 부부는 가족으로서의 어떤 권리도 누리지 못한다.

지난 2월 21일, 고등법원은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동성 배우자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라고 판결했다. 2019년 결혼식을 올리고 사실혼 관계로 함께 살았지만, 현행법상 부부로 인정받지 못한 한 동성 부부는 한국 최초로 배우자를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했다.

공단은 그로부터 8개월 후 피부양자 자격을 취소했고 이에 이들은 피부양자 자격을 부정한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1심 원고 패소 후 항소해 2심에서 승소했다.

소송에 함께 한 국제엠네스티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한국이 혼인 평등에 한 걸음 다가서는 중요한 결정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동성 부부가 법원에 의해 법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국회에선 4월 26일 국회의원 11명이 공동으로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안(이하 생활동반자법)을 발의했다. 9년 전에도 발의를 준비했던 이 법률안은 보수단체와 종교단체 등의 반대로 발의하지 못했다.

가족을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뤄진 단위’로 협소하게 규정하는 현행 건강가정기본법은 법적 가족 이외의 공동체를 보호하지 못하고 있기에 ‘법적 가족 밖의 가족’들에게도 혼인·혈연 가족에 준하는 사회보장을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가 계속됐다.

생활동반자법은 ‘생활동반자 관계’로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에 사회보장제도 상의 권한과 보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 법안은 혼인과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함께 사는 사람이 서로에 대한 법적 보호자로 부양, 법정대리인, 각종 보험의 피부양자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생활동반자법이 보수단체와 종교단체의 반대에 부딪히는 이유는 동성혼을 위한 법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생활동반자법은 혼인보다 느슨한 관계를 맺고 그만큼 권리 보장의 범위도 혼인보다 좁다. 성별이나 성적 지향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해당한다.

동성혼은 말 그대로 결혼을 말하며 상속 등 보다 많은 권리가 부여돼 생활동반자법보다 결속력 높은 결합이다. 혼인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보다 더 다양한 가족구성권이 요구되지만, 지금은 생활동반자법만이라도 제정되기를 바란다.

서울시가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광장 사용 신청을 불허했다고 한다. 대구에선 대구퀴어반대대책본부와 동성로상점가상인회가 작년 축제 당시 불법도로점용과 판매행위를 이유로 대구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와 활동가 등을 경찰에 고발했다. 춘천시도 축제 장소를 불허했고 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국가와 행정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묵인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차별행정을 통해 인권을 후퇴시키고 있다. 인천은 제6회 인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를 지난 3월 발족했다. 성소수자들은 존재의 증명을 위해, 엘라이는 친화적인 동료가 되기 위해 차별과 혐오를 무너뜨리고 연대할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 무지개는 이어진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