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아이들은 모든 곳에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문장은 아이들에게 위험한 공간까지도 무조건적으로 개방돼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로 글을 시작한다. 이 말은 우리가 사는 그 어느 곳에서라도 아이들을 환대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키즈 존’은 없다. 마찬가지로 ‘노(no)-키즈존’ 또한 없어야 한다. 아이들은 많은 곳 가운데 ‘일부’에서만 허용받는 존재가 아니며,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모든 곳에서 보호받고 환영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가닿는 공간이 everywhere(어디나)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특수하게 허용된 일부 구역(zone)이 아닌 ‘전체’(world)이어야 한다.

어린이날을 앞둔 오늘, 흥미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제주도에서 ‘노키즈존’을 아동 차별로 간주하고, ‘제주도 아동 출입제한업소(노키즈존) 지정 금지 조례안’을 발의했다는 이야기였다.

제주도는 관광도시인 만큼 외부인의 출입이 잦고 개중에는 가족 단위의 여행객도 많은데, 특정인을 출입 제한하는 것은 제주도의 가족·아동 친화적인 제주도 만들기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조례 입법 예고를 다루는 한 기사를 보면, 제주도의 노키즈존은 국내 노키즈존의 14.4%로 상당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제주연구원 사회복지연구센터에 의하면 이는 관광지라는 지역 특수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을까. 보호자의 동반이 필요한 아이가 속한 가족 단위의 이동이 장려되고 수용되는 공간(예컨대 관광지)에서, 이동 구성원 중 일부를 차별하는 것은 권리 침해에 해당한다고 말이다. 그렇다. 아동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아동의 이동권을 제한하는 것은 권리의 침해다.

노키즈존과 장애인 이동권 제한

약간 다른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최근 우리 사회의 논란(?) 가운데 하나인 ‘선량한 시민의 이동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장애인 이동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떠오르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때로 자신을 ‘보편의 다수’로 상상하고 그것에 기준을 두면서 기준 바깥의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그러나 ‘보편 인간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자유가 바쳐져야 하는 이유는 없다.

누군가의 이동이, 단지 그 존재가 이동하기 때문에 문제가 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들의 이동이 물의를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가 물의를 일으킨다는 주장과 동일한 바, 권리의 부정과 침해에 해당한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2017년에 인권위에서 한 차례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아동의 입장을 거부한 식당의 사례에 대해 인권위는 ‘합리적 이유가 없는 차별행위’라고 봤다.

5년여 전 이러한 공식적 언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21년 전국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 노키즈존 운영에 찬성하는 응답이 71%나 된다는 것은 놀랍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는 특정 시설에서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지속함으로써 행위가 제한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초점화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불쾌를 유발한다는 인식과 연관됐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제한의 대상이 사회와 성인에 의해 절대적인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아이’(와 그들의 직접적 보호자)라면, ‘돌봄’에 대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무를 전방위적으로 방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다’는 말은, 단순히 성인 미만 연령의 존재를 계도나 훈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이미 겪어왔던 존재의 양태이므로 모든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우리가 어떤 어른이 되기까지 반드시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어린이 됨은, 곧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자신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런 차원에서 ‘허용과 불허’라는 방식으로 사유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노키즈존에 대한 문제는 관광지의 관광객 유치 차원의 문제를 넘어 사유될 필요가 있다.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노키즈존을 두둔할 수는 없다. ‘노키즈존’은 결국 ‘어른의 관점에서 충분히 사회화되고 예의 바른 어린이만을 허용하겠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것은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사회화되지 못하고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 불쾌를 끼치는 이가 곧 ‘어린이’인 것은 아니며, ‘어린이’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행하는 것 또한 아니다.

어린이는 단순히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차후 상호 존중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로 특정 시기를 경험하는 존재다. 인간이 그런 시기를 거쳐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시기가 곧 자신을 이뤘다는 말인 바, 어린이에 대한 이해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인 셈이다.

덧붙이건대,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상품가치로서 인간을 사유하는 오늘날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숙고해 보는 것으로 확장할 수 있음에 다음의 논의를 덧붙인다.

김원영은 ‘낭만적 예찬을 넘어서-이미지 시대의 아동을 생각하다’(전기가오리, 2021)에서 노키즈존을 위시한 페도포비아(pedophobia)는 아이의 귀여움만을 인적 자원이자 상품가치로서 인정하고자 함에 따라, ‘귀엽지 않은 아동에 대한 거부와 배제’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 관점을 이 칼럼의 논지와 연결지어 볼 때, 아이와의 만남이 예견되는 모든 장소에서 ‘귀엽지 않은 아이’를 차별과 혐오의 근거로 드는 일은, 상품 가치가 없는 인간의 속성은 모두 배제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존재를 존재 자체로 대하지 못하고 ‘이익의 여부를 가늠하게 하는 상품’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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