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섭 다문화학 박사

인천투데이|200년전 프랑스 법관이자 미식평론가였던 샤바랭(J. A. Brillat-Savarin)은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Tell me what you eat, and I will tell you what you are)”라고 언명한 바 있다.

비슷한 시기에 대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내 곁에 있는 사람,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읽는 책들이 나를 말해준다”라고 변수를 추가한다. 그 밖에도 내가 입는 것, 내가 사는 곳, 내가 하는 말들이 곧 나를 말해준다는 식의 다양한 변주들이 이어졌다.

언뜻 매력적이고 재치있는 명제로 종종 회자되지만, 이런 몇 가지 요소들을 근거로 한 단순화로 한 사람의 복잡다단한 정체성, 때론 작은 우주에 비유되기도 하는 오묘한 전인적 면모를 쉽게 정의하고 재단할 수 있을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과연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 이인화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은 비극 리어왕(Act 1, Scene 4)의 절규하는 대사에서 따온 것이다.

그 400여년 전 셰익스피어에게도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의 문제 뿐만 아니라, 사람을 제대로 안다는 것, 더구나 제 자신이 과연 어떤 인간인지를 안다는 것,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봐야할 정도로 실로 어려운 문제였던 셈이다.

이 질문에 대한 수많은 동서고금의 답변들이 주목한 요소는, 괴테도 언급하였듯이, 내 곁에 있는 사람 혹은 내가 만나는 사람 다시 말해 ‘인간관계(人間關係)’라는 거다. 여기에도 자칭 인간관계 전문가들의 다양한 변주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주역(周易)학자 김승호는 누구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사람의 운명, 즉 운(運)이 바뀌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길흉화복은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동물로서 세상을 산다는 것은 곧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 함께 한다는 뜻이니, 어떤 사람을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한 예로, 미국과 중국에서 인간관계 교육가로 유명한 리웨이원(李維文) 또한 오늘 누구를 만나는지가 10년 후의 내 모습을 좌우하게 되고 사람의 인생은 결국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인생에서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인데, 이 때 현명한 방법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기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집중하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집중하는 것

괴테와 실러 동상.(출처 픽사베이)
괴테와 실러 동상.(출처 픽사베이)

사람은 살아가면서 거치는 삶의 단계, 굽이굽이에서 반드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타인(他人)들에 의해 스스로 변화하고 성장하게 된다. 리웨이원은 특히 인생에서 삶의 결과를 달라지게 만드는 일곱가지 인간관계를 꼽았다.

가족 외에 처음으로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인 동시에 인생의 20년 후를 예측할 수 있게 하는 소꿉친구,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어른으로서 스스로 삶을 책임지는 나이에 만나게 되는 사회적 롤 모델인 멘토, 같이 일하며 함께 성장해야할 동료, 제대로 된 실력을 쌓을 수 있게 도와주는 상사, 돈보다 더 중요한 관계를 알게 해 주는 사업파트너, 때로 내게 죽비를 내려칠 수 있는 평생지기, 그리고 인생의 끝까지 동행할 소중한 배우자, 이들 일곱 부류의 사람이 누구냐가 인생을 달라지게 한다는 것이다.

양금택목(良禽擇木)이라고 날짐승조차도 나무를 가려 앉고, 흰 모래도 진흙에 섞이면 덩달아 검어지고(백사재니여지개흑白沙在泥與之皆黑) 꾸불꾸불 자라기 마련인 쑥도 삼밭에서는 저절로 곧게 자란다(봉생마중불부자직蓬生麻中不扶自直)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렇게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의 초점을 ‘누구(Who)를 만나야 하는가’에 맞춘다는 것은 꽤나 설득력이 있고 지극히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시쳇말로 누굴 만나야 득이 되고 누구누구는 만나봐야 별 영양가가 없다는 식으로 가다보면 속물적 처세술 같기도 해서 왠지 씁슬해지고 비루함마저 느끼게 된다.

이렇게 이해타산과 이기(利己)를 좇는 인간관계가 바람직한가라는 윤리적 차원은 차치하고 논리적으로 보아도 과연 누구누구를 만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소되고 저절로 그 인생이 만사형통이 된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관계에 대한 우리의 사유(思惟)를 누구(Who)에서 어떻게(How)로 초점을 옮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타자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

그 출발점은 ‘타자(他者)’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이다. 인간관계라는 개념은 필연적으로 타자의 등장을 전제로 한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Louis Althusser)에 따르면 타자들과의 마주침은 그 기원에서나 그 효과(결과)들에서나 우발적이어서 기왕에 일어났지만 한편으로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그렇다 치고 미래에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날지도 지금은 예측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타자 없이는 펼쳐지지 않을 나의 미래는 ‘불확실성(不確實性)의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지옥, 그것은 타자’라고 했던 것일까.

타자를 만나는 순간부터 새로운 나의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것, 새로운 타자를 만날 때마다 새로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나’, 그것은 사르트르 말대로 끔찍한 지옥의 경험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 불확실성은 한편으로는 위협적인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가능성(可能性)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나와 다른 타자를 억압하고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 존재하는 차이(差異)를 제거하려는 만남보다는 나에게 색다른(새로운) 깨우침을 주는 마주침을 강조한다.

색다른 배움을 주는 관계와 만남이어야 바람직한 인간관계

바람직한 인간관계란 늘 동일한 사람과의 반복적 과거세계가 아니라 색다른 배움을 주는 관계와 만남이어야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동일성’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새로운 만남, 혹은 설사 같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새로움을 주고 받고 인간관계의 심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래서 나선형의 동심원처럼 진화하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차이’ 생성의 패러다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관계는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 진보 사상가 신영복(申榮福)은 인간의 변화란 것이 결코 개인 단위로는 완성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사람의 변화는 곧 관계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서 스스로의 변화도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관계는 또한 자기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이 되기도 한다. 나아가서 인간이 인간관계의 산물이라면 인성(人性) 혹은 인간성(人間性) 또한 그 인간관계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인성을 바꾸고자 한다면 그 또한 인간관계를 개선하고 바꾸려는 노력과 방향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하여 결론 삼아 보자면, 내가 맺는 인간관계가 나를 결정하는 것인 동시에 나는 그 인간관계들의 사회적·역사적 합작품인 것이다. 내가 맺어 왔고 맺어 가는 사회적 관계(社會的 關係)의 총화(總和), 그것이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지. 다행스럽게도 어느 노래 제목처럼, 끝날 때까지 ‘인생은 미완성(未完成)’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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