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섭 인천문화재단 평화교류사업단 과장

정민섭 인천문화재단 평화교류사업단 과장
정민섭 인천문화재단 평화교류사업단 과장

인천투데이|1948년 12월 5일 제주도. 애월에 위치했던 외도지서에 하귀리 주민들이 모였다. 동절기 땔감을 마련하라는 경찰의 동원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톱과 낫을 들고 온 주민들은 10대 후반 청소년부터 장년, 부녀자까지 다양했다. 경찰은 이 중 젊은 청년들만 골라 군법회의에 회부시켰다.

1948년 10월 11일 애월면 금덕리. 제주 무장대를 진압하기 위한 토벌대가 마을로 들어갔다. 토벌대는 금덕리 마을을 수색하면서 물거리로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킨 뒤 이 중 청년 20명 여명을 연행해 제주농업학교에 구금했다.

1948년 12월 제주읍 아라리 박성내. 제주에 입도한 진압군은 조천면민을 대상으로 자수하라고 협박했다.

“과거 조금이라도 잘못한 사람은 자수하라. 나중에 발각되면 총살을 면치 못한다. 이미 관련자 명단을 확보했다.”

진압군의 회유와 협박으로 겁에 질린 주민들이 자수를 했다. 이들은 주로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혹은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거나 1947년 3.1절 발포 사건 항의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또 일부는 무장대의 요구에 따라 식량을 제공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진압군은 자수한 주민 중 약 100여명을 총살했고 그 외 살아 남은 주민 36명은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위 세 가지 사례는 모두 제주 4.3 당시 일어났던 사건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제주 4.3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국가 폭력에 의한 학살이었다.

4.3사건 진상보고서를 보면, 당시 희생된 사람은 2만5000명에서 3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1948년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이 1이라고 한다.

제주 4.3 당시 제주농업학교에 주둔한 제59군정중대 캠프 모습(ⓒNARA)
제주 4.3 당시 제주농업학교에 주둔한 제59군정중대 캠프 모습(ⓒNARA)

해방 후 분단과 이념의 충돌은 이렇게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그런데 위 세 가지 사건은 모두 인천과도 관련이 있다. 군법회의에 넘겨진 주민들이 인천소년형무소로 이감된 것이다.

당시 인천소년형무소는 청소년 범죄와 관련한 수형자를 수용하던 곳이었다. 이런 까닭에 인천형무소에 갇힌 4.3 관련 주민들은 대부분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수형자가 많았다.

‘제주4.3 추가 진상보고서’를 보면, 인천형무소에 수용된 4.3 관련 제주 주민은 모두 250여 명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위 사례에서 보았듯 제대로 된 법적 절차 없이 연행‧구금됐으며 군사 재판 혹은 일반 재판에 넘겨져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육지의 형무소로 수감됐다.

이렇게 인천으로 온 제주 4.3 관련 수형자들은 어떻게 됐을까. 당시 인천형무소는 열악한 수용 환경으로 영양 실조와 전염병 창궐 등이 빈번히 일어났다.

또, 투옥 전 경찰의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도 많았다. ‘제주 4.3 추가 진상보고서’에서 확인된 바로는 전체 제주 출신 재소자 250여명 중 25%인 61명이 옥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옥사자 외 수형자들의 운명도 기구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내려오자 6월 30일 인천형무소 직원들은 수형자들을 방치한 채 퇴각했고 수형자들은 수원 등지로 흩어졌다가 국군에 의해 다시 검속됐다.

국군은 출소한 재소자와 형무소 직원들을 형무소로 다시 복귀시켰다. 그러나 7월 3일 인민군이 인천 시내로 들어오자 인천형무소 직원들은 다시 수형자를 남겨 둔 채 퇴각해 버린다.

인천에 들어온 인민군은 형무소 내 수형자들을 일반범과 사상범으로 분류해 4.3과 여순사건에 연루된 사상범들을 의용군으로 편입했다. 그 결과 인천형무소에 수감된 제주 수형자 중 일부는 전쟁 과정에서 포로로 잡혀 제주로 돌아갔지만 상당수는 인천상륙작전 시기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갔고 대부분 행방불명됐다.

실제로 지난 2000년 이후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시 인천형무소로 수감됐다가 의용군으로 끌려가 북한에 생존한 주민 5명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렇듯 인천형무소에 수감됐던 제주 4.3 관련 수형자들은 전쟁이라는 직접적 폭력 상태에서 또 다른 희생을 당해야 했다.

지난 4월 3일은 제주 4.3이 일어난지 75년이 되는 날이었다. 수많은 세월 제주도민들은 4.3의 상흔으로 고통받았다.

그런데 4.3의 상흔이 남겨진 공간이 제주 뿐만이 아닌 인천에서도 있을 것이라고 많은 시민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 제주 4.3, 국가폭력에 의한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인천에서 일어났던 제주 4.3 관련 수형희생자의 아픔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추념하고 인천에서 제주 4.3 수형자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 밝혀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이 땅에서 이와 같은 불행한 사건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