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섭 다문화학 박사

인천투데이|조선조 명종의 뒤를 이어 열일곱 나이에 왕이 된 선조(宣祖), 스물셋 재위 7년(1574년)에 이르러 심각한 정치적 난관에 봉착했다. 자연재해가 거듭되고 민생이 곤궁해지자 민심은 날로 악화됐다.

위기의 선조, 도대체 시정(施政)의 문제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찌풀어야 할지 거리낌없는 쓴소리를 해달라고 거듭 신하들에게 구언(求言)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하늘 같은 임금님이 수차례 다그쳐도 도통 입을 여는 신하가 없었다.

마침내 총대를 메고 상소문(上疏文)을 지어 올린 이가 있으니 그해 서른아홉살 승정원 우부승지 이이(李珥)였다.

율곡 이이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근심거리 일곱 가지(칠우七憂)를 꼽고 나서 그걸 개혁하기 위한 요체로 아홉 강목(綱目)을 제시했다. 그 중 넷은 임금 스스로 혁신해야 할 수기(修己)요, 다섯은 안민(安民)에 관한 것이니, 전자는 곧 리더십이요, 후자는 민생정책인 셈이다.

율곡이 모든 문제들의 뿌리이자 첫째가는 폐단으로 꼽은 것은 바로 ‘믿음(信)’과 ‘소통(疏通)’의 문제였다. 율곡은 임금과 신하들 간에 진실된 믿음이 없다(상하무교부지실上下無交孚之實)고 통박했다.

임금을 향해 ‘명철함은 부족함이 없으나(명예유여明睿有餘) 지닌 덕이 넓지 못하고(집덕불홍執德不弘), 선(善)을 좋아함이 얕지는 않지만(호선비천好善非淺) 깊은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다의미거多疑未祛)’고 날을 세웠다.

어디 한 번 그 근거를 대 보거라, 일그러지는 선조의 얼굴이 떠오른다. 율곡이 거침없이 들이미는 증거는 이랬다.

경기도 구리시에 소재한 선조 왕릉.(자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구리시에 소재한 선조 왕릉.(자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금께서 ‘열심히 건백(建白-윗사람에게 의견을 냄)하려고 애쓰는 신하들은 주제넘다고 의심하고, 기절(氣節-굽힐 줄 모르는 기개와 절조)을 숭상하는 신하를 가리켜 과격하다고 의심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인기있고 평판 좋다고 칭송을 듣는 신하를 보면 당파가 있다고 의심하고, 혹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공격하면 그것이 모함이라고 의심한다’는 거다.

게다가 ‘신하들에게 지시할 때는 그 말 속에 감정이 들어 있고(사기억양辭氣抑揚),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가 일관되지 않다(호오미정 好惡靡定)’고 덧붙였다.

이쯤되면 제아무리 도량 넓은 군자라도 어찌 안색이 흐려지고 일그러지고 파래지고 붉어지지 않을 수 있겠으며 상소문을 받아 든 두 손이 부르르 떨리지 않을 수 있으랴. 그 앞에 서 있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하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오금이 저릴 듯하다.

노골적이고 서슬퍼런 율곡의 독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율곡은 한 번 더 임금의 폐부를 깊이 찔러 들어갔다.

임금님이 신하들을 깊이 신뢰하지 않는다(심신유소부족深信有所不足)고. 그러니까 군신(羣臣)들은 성상(聖上)의 뜻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부지성의지소재不知聖意之所在)고.

때문에 임금님이 전교(傳敎)할 때 한마디만 이상하면(일언이상一言異常),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지고 두려워하여(막불해목출심莫不駭目怵心) 항상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연못을 대하는 듯하다(상약림불측지연常若臨不測之淵)고.

그러니 신하들이 부름을 받게되면 모두 그저(只) ‘황공(惶恐)하옵니다’만 반복할 뿐, 누구 하나 천심(天心)을 돌리고 세도(世道)를 구할 수 있는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무일책無一策)고. 가장 가까이 있는 신하(근밀지신近密之臣)조차도 그런 지경인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그걸 어찌 헤아리겠는가(상미효성심尙未曉聖心)고.

그렇다면 과연 이 문제는 어디서 비롯됐단 말인가. 선조가 정치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무실공無實功)의 주된 원인은 바로 참되고 성실한 마음(정성精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율곡은 일갈(一喝)한다.

즉, 저 옛날 맹자(孟子)의 가르침처럼 지성(至誠)이면 천하에 움직이지 못할 바 없음(미유부동자未有不動者)이요, 자사(子思)의 깨우침처럼 불성(不誠)이면 아무것도 되는 게 없음(무물無物)이라는 거다. 임금의 정성이 부족하니 군신 간 교제(交際)를 한 꺼풀 벗겨내 보면 그 속에는 실상 참되고 믿음성이 없다(성신미부誠信未孚)는 거다.

‘믿음의 부재와 정성의 부족,’ 이 문제를 어찌하면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율곡이 선조에게 수기(修己)의 으뜸 강목으로 충언한 바는, 편협한 사심을 버리고(거편사去偏私) 넓고 공평한 마음의 도량에 이르는 것(이회지공지량以恢至公之量)이다.

반대로 능히 평정심을 갖지 못하고(불능평심不能平心) 목소리와 얼굴빛을 크게 언짢게 하는 것(대려성색大厲聲色), 이것이야말로 목구멍과 혀 역할을 하는 신하들조차 멀어지게 하고(소후설疏喉舌) 결국에는 정치적 측근들만 곁에 남게 하는 것(친환관親宦官)이라고.

이제 작금의 시대 현실로 돌아와 본다. 말로는 너나없이 소통, 소통하는 언필칭 소통(疏通)의 시대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생각이든 관계든 간에 막힌 것을 뚫고 벽에다 자그마한 문 하나 내는 것조차 난망하고 아득해 보이는 때가 이전에 또 있었던가 싶다. 저마다의 극단과 자기확증의 편향만이 팽배하고 만연한 시절이지 않은가.

소통을 막으면, 혹은 소통이 막히면 그 뒷일은 어찌 되는가. 다른 목소리가 있을 자리가 없어진다. 건전한 비판도 사라진다. 국가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크고 작은 공동체, 이런 저런 조직도 마찬가지로 천편일률이고 현상유지 일색이 된다.

그런 환경이라면 획일적이고 경직된 집단사고(groupthinking)에 문제를 제기하는 위대한 반대자(great dissenter)가 설 자리는 당연히 없다.

더 나은 대안을 찾아낼 가능성을 가진 새로운 시각과 접근을 제공할 이른바 레드팀(Red Team)도 존재하기 어렵게 된다. 조직이 한통속으로 잘못된 길로 빠지는 오류,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이는 시행착오를 막아설 ‘악마의 대변인(Advocatus Diaboli)’도 버틸 재간이 없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또 그 다음은 어찌 되는가. 비겁한 동조자(同調者)들만 우글대며 차고 넘치지 않을까. 우리 방 안에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될 ‘커다란 검은 코끼리(black elephant in the room)’가 이미 들어와 앉아 있는데도, 모두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먼저 나섰을 때 자신에게 초래될 위험이 더 두렵다면 쉽게 말을 꺼낼 수 있을까.

‘회색코뿔소(gray rhino)’가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쳐도 애써 못 본 척하려 들지 않을까.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처럼 수많은 위험의 전조(前兆)가 있어도 외면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는 사이에 눈치 빠른 개미와 두꺼비 떼는 말없이 지진을 피해 도망치기 바쁠테고, 하필 이럴 때면 ‘잠수함의 토끼’조차 아무런 위험 신호를 보내지 않고 침묵해버리지.

‘언로를 활짝 열고(확개언로廓開言路) 충고 받아들이기를 꺼리지 마십시오(용수불휘容受不諱). 소신(小臣)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受國厚恩), 가마솥에 삶아져 죽거나 도끼로 목을 잘리더라도(정확부월鼎鑊斧銊) 진실로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구리어국苟利於國) 결코 피하지 않겠습니다(신불피臣不避).’

이처럼 율곡이 죽음을 무릅쓴 결기와 피를 토하고 뼈를 깎는 간절함으로 받들어 올린 1만2000자 가량의 상소문이 저 유명한 ‘만언봉사萬言封事’다. 율곡의 마지막 진언(進言)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 군정을 고쳐서(개군정改軍政) 안팍으로 방비를 견고(고내외지방固內外之防)하게 하지 않으면 십년 안에(불출십년不出十年) 반드시 난리를 면치 못할 것(화란필흥禍亂必興)이란 경고였다.

‘만언봉사’를 올린지 10년만에 율곡은 죽고(1584년) 그로부터 채 10년이 안 된 선조 재위 25년(1592년)에 임진왜란의 참화가 끝내 조선을 덮쳤다. 코끼리와 코뿔소는 결국엔 일을 내고 만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