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5도평화운동본부 정책위원장 조현근

“우리는 통일될 때까지 평화공존 하면서 교류, 대화도 하고 평화통일의 기반을 굳혀나가야 한다!” 이 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4년에 밝힌 연두 회견문 중 일부다.

‘평화공존’은 서해5도 주민에게 생존의 문제다. 서해5도 접경수역에 대한 역대 정권의 대북정책은 북방한계선(NLL)을 기준으로 모두 평화공존을 지향하고 있으나 그 방법론에 차이가 있다.

조현근 서해5도평화운동본부 정책위원장
조현근 서해5도평화운동본부 정책위원장

크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안보를 기반으로 한 ‘선을 지키는 평화공존’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제를 기반으로 한 ‘면을 만드는 평화공존’으로 나눌 수 있다. 이번에 두 전직 대통령의 서해5도 주민에 대한 정책을 살펴보고자하며, 우선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을 먼저 다룬다.

연세가 지긋한 서해5도 주민들은 “섬에 살아주는 것만이라도 애국”이라는 말을 여전히 가슴에 품고 있다. 휴전상태에서 수도권 방어를 위한 서해5도의 군사적 중요성을 알았던 군인 출신 박 전 대통령이 섬 주민들에게 한 이야기다.

이 말의 시작은 서해5도와 비슷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타이완의 진먼섬(金門島)에 사는 주민에게 장제스 총통이 그들을 ‘열사거민(烈士居民)’으로 경의를 표하면서 시작된 말이다. 열사(烈士)란 나라를 위해 맨몸으로 저항하며 자신의 목숨까지 건 사람을 말한다. 박정희와 장제스 모두 국가의 안보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섬 주민을 열사로 존중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군사적으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서해 섬 5개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침몰하지 않는 군함이다. 박정희에게 냉전의 화약고에서 살아가는 서해5도 주민들의 생존과 이들에 대한 지원대책은 늘 우선순위였다. 그는 이곳을 지키는 군인과 주민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박정희 서거 이후 언제부턴가 대한민국 정부는 서해5도를 여타의 육지 지역과 동일시한 형평성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에게 서해5도 주민은 특수한 주민으로 국가가 아끼고 보호해야 할 애민의 대상이었다.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에도 최고위원들을 서해5도에 보내서 어업실태 파악을 지시했다. 현지 조사를 한 최고위원들은 그해 5월 서해5도에 모여든 조기잡이 어선이 700여척이며 앞으로 2000여척으로 늘어나 정부 목표 어획량 1만톤을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보고했다. 이에 박정희는 “어민들에게 정부가 도와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할 것과 섬에 대한 정부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문공부의 서해5도 위문공연이 해마다 이어졌고, 이효상 국회의장과 정일권 국무총리의 섬 방문 등 국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계속됐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서해5도 학생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바다 건너 200㎞가 넘는 백령도 학생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직접 책가방도 일일이 나눠주고 애로사항을 챙길 정도였다. 정무수석을 백령도에 직접 보내 주민을 위로하기도 했다.

청와대 백령도 학생 초청 1968년 박정희(좌)와 1967년 육영수(우) 출처 국가기록원
청와대 백령도 학생 초청 1968년 박정희(좌)와 1967년 육영수(우) 출처 국가기록원

1964년 6월 정부는 서해5도 어민의 조업을 보호하고자 북방한계선과 나란한 최초의 서해 어로한계선을 신설하였다. 이후 1967년 12월 어로한계선을 3마일 남하했고 1968년 11월에 서해특정해역을 추가 지정했다.

이 시기 서해5도 수역에서 북에 의한 어선의 납북과 총격 피해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1969년 3월에 내무부, 법무부, 국방부, 농림부 등 4부 장관 합동고시로 안보를 위한 어업 제한이 불가피해 또다시 어로한계선을 남하시켰다.

당시 국무회의에 상정된 ‘서해어로한계선변경(안)’문제점으로 서해5도 주민의 육지왕래 두절과 주민 철수 문제, 어민(1만9889명, 626척)의 연간 피해액(1만950톤, 5억6355만원) 발생 등이 대두됐다. 이에 정부는 서해5도 어민에 대한 중단기(1969~1971년) 대책으로 어선 150척 건조 지원, 어선 동력개량 80대, 양식지원 400ha 사업을 제시했다.

박정희는 1973년 10월부터 11월까지 43회에 걸친 북의 이른바 ‘서해 사태’로 주민 이주대책까지 검토했다. 그러나 ‘서해5도 사수(死守)작전’을 결정하고 주민 대피시설과 몇 달 동안 버틸 수 있는 식량을 비축케 했다. 또한 군사시찰단을 타이완 진먼으로 급파해 요새화된 군사시설을 보고 배우게 했고 그곳을 모델로 서해5도를 요새화 했다.

후속 주민대책으로 1974년 오늘날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의 전신인 ‘서해5도서 지역주민 생활 안정 중기대책’을 수립하고, 시급한 주민 식량 보관 문제 해결을 위해 특별금으로 백령도와 연평도에 양곡창고를 지어 줬다.

1975년엔 섬의 전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령도 풍력발전시설 연구개발과 주민 의료를 위한 병원선 건조도 지시했다. 1976년 진료실, 약제실, X선실, 수술실, 입원실 등 시설을 갖추고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치과 등 6개 과목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선 백연호를 취항시켰다.

박정희는 서해5도 주민의 인구와 소득 현황을 해마다 직접 챙겼다. 1976년에 백령도를 면에서 군으로 승격할 것도 지시했다. 1977년 백령도는 평균 3집에 1대꼴로 TV가 보급됐고, 섬 안에서 거둔 쌀은 1만8000가마에 이르렀고, 당시 주민 평균 소득은 110만원에 달했다.

1978년 2월 경기도 업무보고에서 “그동안 서해5도 주민의 수가 줄어든 원인을 생각하면 접적지역으로 어로저지선을 남하시켰기 때문에 주민의 어업이 부진한 데 있었던 것 같다”고 지적하고 “어민들이 서남방면으로 출어할 수 있도록 어선을 대형화하고 동력화 하는 데 힘쓰라”고 당부했다.

곧바로 1978년 5월 경제기획원은 국무회의 예비비 지출 안건으로 서해5도 어민 소득증대 사업지원을 부의했다.

당시 자료를 보면 “서해5도는 안보상 취약지구로서, 어민소득을 증대하고 안전조업을 보장하기 위해 20톤급 대형어선 5척 건조를 지원하고 무동력 소형어선들을 10톤급 동력어선으로 대체함으로써 어업생산성을 제고하는 동시에, 50톤급 쾌속지도선 1척 건조를 지원해 안전조업을 보장하기 위해 3억1000만원을 1978년 일반회계 예비비에서 지출코자 하는 것임”을 명시했다.

어업 외에도 농수산부에 1980년까지 서해5도에 초지 50.9ha를 조성하고 주민에게 육성우 610마리를 기르게 하는 등 농축산분야 소득증대 사업도 지시했다.

“서해5도에 사는 것만도 애국”이라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은 엄존하는 남북분단 상황에서 국가 최고지도자의 서해5도 주민에 대한 존중과 슬픔, 번민과 연민의 정이 담긴 말이다.

과거 가난했던 대한민국의 박정희 시대에서 현재 세계 경제 대국 10위로 성장한 대한민국에서도 서해5도의 중요성은 그 자리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 그 섬에 주민이 있어야 대한민국의 주권과 정당성이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휴전협정 이후 군인들과 함께 분쟁의 바다에서 묵묵히 일상을 지키고 있는 서해5도 주민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 최근 백령도 여객선 문제, 해상풍력 이동권 침해, 조업 규제 등 대부분 현안은 정부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다.

끝으로 백령도 한 어민이 과거 토론회 때 참석해 발언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동안 대한민국 수뇌부들은 서해5도에서 사는 것 자체가 애국이라고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애국자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불공평했습니다. 정부는 분쟁의 바다로 인해 한 맺힌 상처들을 치유해 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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