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수 사람사는농원 대표

인천투데이 |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 왔다. 곳곳에서 꽃소식을 전해준다. 매화 개화 소식은 이미 오래고, 오늘 오후 통화한 광주에 사는 형님은 남도에는 벌써 벚꽃이 피었다 한다. 시국은 어수선하지만 그래도 봄기운을 놓칠쏘냐 곳곳에서 봄소식을 전한다.

이영수 사람사는농원 대표.
이영수 사람사는농원 대표.

어느덧 경북 영천에 귀농 16년차.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오고 있다. 1만여평의 과수원이 조만간 살구꽃과 복사꽃이 흐드러진 꽃밭이 될 예정이다. 친환경 무경운(땅을 인위적으로 갈지 않음) 방식으로 농사짓는 밭에 민들레까지 피어오르면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부럽지 않다.

복숭아 꽃 만개할 때면 상춘곡의 구절처럼 내 좋은 이들과 복숭아나무 아래서 꽃가지 꺾어놓고 수놓아 술을 마시는 상상을 종종 한다.

사실 꽃이 피는 봄은 과일 농사꾼에게 긴장의 연속이다. 꽃이 피는 시기에 기온이 밤새 영하로 내려가거나 서리라도 내리면 연약한 암술이 죽어버리거나 씨방이 얼어서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고 제 아무리 좋은 판로를 갖고 있다 한 들 결실이 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래서 개화시기 동안 농민들은 몇날며칠 새벽잠을 설쳐가며 꽃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한 해 농사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살구꽃 망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걸 보니 살구나무가 곧 꽃을 피울 것 같다. 살구는 매화 다음으로 빨리 꽃을 피운다. 그만큼 냉해피해가 많아 살구농가는 꽃만 피면 잔뜩 긴장한다. 귀농초기 개화기 냉해로 살구농사를 3년 연속 망한 적이 있다. 매년 컨테이너 박스로 500박스 정도를 수확해야 하는데 결실피해로 불과 20박스도 건지지 못했다.

살구꽃이 피는 2주 동안 새벽마다 일찍 깨 온도를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불안하면 캄캄한 과원으로 달려가 물도 주고 불도 피우고 담배 한 개 피 피울 새 없이 온갖 정성을 들였다. 그런데 하루아침 냉해로 시커멓게 변해버린 살구 꽃망울을 보고 있자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럴 때 마다 아버지 산소에 막걸리 몇 병 사들고 가서 울고 오곤 했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복숭아 농가들은 벌써부터 올해 한랭 피해가 없을지 걱정이 많다.

몇 년 전 전국적인 한파로 복숭아 농사에 피해를 본 경험이 있기에 10여년 애지중지 키워 온 나무들이 봄이 와도 꽃을 피우지 못하면 어떡하나 조마조마 하다. 혹 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또 다시 몇 년을 허송세월로 보내야 하기에 경제적 피해가 크다.

가슴 조마조마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어느 날 아침 연분홍 복숭아꽃이 활짝 피고 살구꽃이 활짝 피었을 때. 그 안도와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사실 식물학적으로 보더라도 성한 나무들이 꽃을 피우는 데 겨우내 저장했던 양분의 대부분을 쓴다니 우리가 만끽하는 봄꽃은 어느 하나 저절로 피는 게 없는 샘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깨달았다. ‘봄이 오면 꽃이 핀다’는 게 결코 당연한 순리가 아니라는 것을. 올 봄에도 그 당연한 순리를 위해 나무들은 온 힘을 다했고 농부들은 하루하루 애간장을 녹이며 봄날을 맞이한다는 것을.

돌아보면 농민이 되기 16년 전 나의 봄은 슬펐다. 지금이야 귀농, 귀촌이 보편화돼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농민이 된다는 것은 뜬금없는 소리였고 사회적 공감대를 얻기 어려운 시기였다.

제발 당신 같은 농사꾼만큼은 되지 마라며, 없는 형편에 서울에 있는 대학까지 보냈더니 느닷없이 농사지으러 돌아오겠다는 아들에게 아부지는 ‘정 네가 농사짓고 싶으면 내 눈에 안 보이는 곳에 가서 네 마음대로 해라’는 말을 남기고 ‘넘새스럽다(남우세스럽다)’며 그 해 봄이 다가기전까지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까웠다는 말을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는다. 자연의 순리이긴 하지만 그 순리가 절대로 저절로 이뤄졌을 리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저절로 발전하는 것처럼 보여도 따지고 보면 꼭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가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민초들의 투쟁의 결과물인 것처럼, 또 누군가의 희생과 용기가 시대의 새벽을 열고 있을 것이다.

귀농 16년차 봄이 오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피어주는 봄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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