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인간이 노동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은 오랜 명제 중 하나다. 이는 ‘노동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존재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이의 노동에 ‘기댄’ 존재로서 인간이 존재함을 뜻하기도 한다.

경제 활동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집을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는 등 가정과 생활을 돌보는 행위가 우리 생활의 전반을 이루고 있음은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방위적 돌봄 노동은 ‘노동’으로 잘 인식되지 않은 탓에, 인간에게 노동은 너무나 협소한 층위에서 사유되곤 한다. 돈을 버는 것, 개인·기업·국가의 생산력에 기여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래서인지 으레 ‘노동’을 논할 때 사회가 승인한 생산력으로서 노동이 논점으로 회자되는 듯하고 그런 차원에서 ‘인간이 하는 노동’은 삭제되고 ‘노동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만이 남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과 노동에 대한 주제를 다시 꺼내든 것은 지난 칼럼에 이어 우리가 ‘노동하는 삶’ 바깥을 상상하지 못함으로 하여금 어떻게 삶 자체에 대한 지평을 축소시키는지 되돌이킬 필요가 있어 보여서다.

최근 대통령실의 주 60시간 이상 노동시간 개편안에 대한 혼란과 논쟁에 이어 지난달 ‘구직단념자’ 청년인구가 급증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 두 현안은, 인간을 곧 노동 생산력과 일치시키고 생산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그 삶의 양식을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일치한다.

전자의 주장은 국가의 노동 경쟁력과 생산성, 노동 시간의 증가를 비례 관계로 가정한다. 그러나 이 가정은 옳은가. 생산성 향상은 인간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돼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 시간의 증가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거니와, 애당초 인간의 삶이 ‘생산성’에 바쳐져야 하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노동에 기대어 사는 존재라고 해서 온통 노동에 복무함으로써 삶을 사유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청년을 노동력으로 곧장 환원시키며, 노동력으로 환산되지 않는 노동을 수행하는 삶을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담론화될 수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구직단념자’와 관련한 쟁점은 별다른 이유 없이 일을 하지 않는 비경제활동인구가 늘었고 그러므로 국가 경쟁력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비경제활동인구를 해석하게끔 만든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자타의적으로 비경제활동인구에 속하게 된 맥락을 함께 짚지 않고 단순 통계치로 ‘노동하지 않으려는 인구의 증가’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우선 단란한 가정(home sweet home)을 공동체 구성의 이상적인 형태로 재생산하는 근대 자본주의 이후, 경제 활동이 가정 내 돌봄이 전제된 상태에서 전담 가능한 것임을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돌봄 노동은 현재 경제적으로 가치 환산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동력’에 해당하지 않고 그러므로 비경제활동인구를 설명하는 하나의 사례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경제 활동의 전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특히 오늘날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경제적 생활과 일상적 돌봄을 동시 수행하는 것으로 인간의 노동하는 삶에 대한 사유가 재편될 필요가 있다. 요컨대 돌봄 노동을 얼마간 ‘노동력’으로 환원시키는 일이 필요함에도 그것이 문제의 근본을 해결해주지 못하며, 협소한 층위의 ‘노동’ 바깥에 밀려 있는 ‘돌봄-노동’의 문제는 따로 면밀히 논의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편 어째서 경제 생산력에 기여하는 노동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는지에 대한 맥락을 살필 필요도 있다. 한 언론 기사를 보면, 지난 8월 기준 비경제활동인구의 ‘쉬었음’ 요인으로 ‘몸이 좋지 않아서’ 39.4%,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움’ 18.1%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현재 노동 시장에서 고용 불안정 문제와 더불어 노동하는 인간을 처우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이 논점화되지 않은 채 ‘별다른 이유 없이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인구’의 증가가 곧장 문제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즉, 구직단념자 청년이 게으르다는 결론은 속단이며, 인간에게 경제 활동이 반드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능하지 않게 하는 삶의 조건을 수정하는 것으로 논의의 방향이 검토될 필요가 있다.

노동 시장의 불안정성, 한 명의 개인이 자기의 삶을 꾸리는 일로서 경제 활동과 돌봄 노동 등의 문제를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논의는 얼마간 실제적 삶과 동떨어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인간의 노동에 관한 최근의 논점이,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의 주요한 행위로 노동이 자리한다는 전제를 종종 잊게 만들며, 온통 노동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사유하는 것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 때문이다.

어쩌면 노동하는 삶이란, 노동 이후의 삶 혹은 노동 바깥의 삶을 사유하고 경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찰 가능한 것은 아닐까. 이 노동을 하는 까닭, 이 노동이 필요한 까닭이 삶의 지속에 있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헤아려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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