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순덕 마중물 회원
최근에 ‘피로사회’란 제목을 단 작은 책자가 발간됐다. 이 책은 현대인이 피로사회에 살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피로의 원인을 파헤치고 있다. 그것은 타인이나 사회가 아닌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즉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생존하려는 ‘나’이다.

예를 들어 수험생의 서울대 또는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목표가 ‘나’를 피로하게 한다. 그런데 이 목표를 정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스펙 쌓기와 자기계발에 몰두하는데, 이 계획은 모두 자신들이 세운 것이다. 그리고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좌절감에 빠지고 불면증에, 우울증에 시달린다.

잘 나가는 능력 있는 이의 갑작스런 죽음

내가 아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50대 초반의 잘 나가는 대기업 정유회사의 부장 쯤(?) 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모두가 선망하는 연봉에 어느 정도의 명예도 있었고, 알뜰하고 부지런한 아내에, 어느새 그의 키와 덩치를 훌쩍 뛰어넘은 믿음직한 두 아들이 있었다.

그는 꼼꼼하고 책임감 있는 성격이라 자신이 맡은 일을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완수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타인을 배려하는 언행은 아랫사람들에게는 존경심을,윗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가지게 했다. 그는 행여 자신이 힘들어 부모나 가족이 근심할까 고민조차 털어놓지도 못할 만큼 배려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버렸다.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 이유를 그의 아내와 자식, 부모, 형제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이 가족들의 가슴을 시퍼렇게 멍들게 했다. 도대체 사랑했던 이들과 함께 아파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극단을 선택해버린 그의 절망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경제적인 여유에 화목한 가정,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 뭐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 나이쯤 되면 명예퇴직이니 실직이니 해서 불안에 떨고 있을 때, 그는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아니 그를 알고 있는 많은 이들의 착각이었다. 그는 불안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없어져 버린 동료의 책상을 보면서, 자기보다 능력 있는 후배들이 언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을지 모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심한 위장 장애에 변비,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성격이 점점 날카로워졌다고 한다. 점점 자신감을 잃고, 외부와의 교류가 줄어들며 자신 속으로만 침잠(자신의 세계에 깊이 몰입)했을 테고, 그러다 결국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다.

극단적 피로와 사회적 자살

그의 자살에 우리가 곁눈 한 번 주지 못하고 앞만 보고 무작정 달려가게끔 만든 것이 과연 그의 성격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나아가지 못하면 퇴보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전진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스트레스 받고 절망하고 헐떡거렸을 그의 모습에 가슴이 시리다.

이런 점에서 자살은 그가 스스로 택한 것이지만, 그를 자살로 몰고 간 것은 성과와 업적 그리고 스펙 속에서 생존할 수밖에 없는 피로사회 아니었을까? 경쟁에서 도태되면, 발전하지 못하면, 업적을 쌓지 못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민낯을 대면한 그였을 것이다. 그는 항상 무엇인가에 불안해하며 더 나은 성과라는 신기루 속에서 허우적댔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그의 자살 앞에 ‘사회적’이라는 단어를 붙여 ‘사회적 자살’이라고 규정한다. 이 용어는 스스로 택한 자살이되 오이시디(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수치가 보여주듯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살이고, 나만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가 책임져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왜 사회적 ‘타살’이라고 이름붙이지 않는가. 피로사회를 만드는 데 우리 모두가 공범이기 때문이다. 즉 이 사회가 피로사회가 되는 데 우리가 비판적으로 개입해 변화를 모색하기보다 이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응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자살을 전적으로 사회적인 것으로 한다면, 피로사회를 문제 삼지 않은 우리의 책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따금 그를 생각하면 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해서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고, 그의 고통이 나와 내 가족, 친구들, 그리고 이웃의 것이라는 현실 때문이다. 여전히 피로사회 속에 있는 남겨진 그의 가족과 나, 그리고 나의 가족을 위해 이 사회와 동거하기보다 대면하려한다.

※‘마중물칼럼’은 사단법인 ‘마중물’ 회원들이 ‘상식의 전복과 정치의 회복’을 주제로 토론하고 작성한 칼럼입니다. 격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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