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고 박영근 시인] 솔아 푸른 솔아 ①

부평구청 옆 신트리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시(詩)가 새겨진 커다란 돌 하나를 만날 수 있다. 2006년 타계한 고(故) 박영근 시인을 기리는 시비이다. 박 시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시집인 ‘취업공고판 앞에서’를 펴내며 노동시의 주춧돌을 놓았다. 시비에 새겨진 ‘솔아 푸른 솔아-백제 6’은 1990년대 저항의 현장에서 어김없이 울렸던 노래, ‘솔아 솔아 푸른 솔아’의 원작시이기도 하다.

박영근 시인은 1985년부터 2005년까지 20여년 동안 부평에서 살았다. 시인은 이 기간에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쳤다. 그가 남긴 화려한 이력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이뤄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인은 생전 신트리공원길을 자주 거닐었다고 한다. 그가 걸어온 삶의 흔적을 그가 남긴 시, 그리고 그를 추억하는 이들을 통해 되짚어보았다.

공부 말고는 잘하는 것 없는 조용한 소년

▲ 2003년 신트리공원에서, 박영근 시인. <사진제공ㆍ성효숙>
가다가 가다가 / 울다가 일어서다가 / 만나는 작은 빛들을 / 시(詩)라고 부르고 싶다 (중략) 때때로 스스로의 맨살을 물어뜯는 / 외로움 속에서 그러나 / 아주 겸손하게 작은 목소리로 / 부끄럽게 부르는 이름을 / 시라고 쓰고 싶다(1984년 첫 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에 실린 ‘서시’ 중에서)

시인은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달구지가 지나가면 먼지가 폴폴 날리는 시골 동네였다. 시인은 일곱 살 동갑내기가 초등학교에 간다고 하자, 자신도 학교에 보내달라며 부모를 졸랐다. 그 친구는 1월생, 시인은 9월생이었다. 당시는 학교를 제 때 보내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 시인은 다른 친구들보다 한두 살 어렸다. 고향 친구인 허정균(58ㆍ환경운동가)씨는 “영근이는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늘 혼자였다. 공부 말고는 잘 하는 것이 없는 조용한 친구였다”며 시인을 기억했다.

시인은 중학교 입학을 위해 5학년 때 익산으로 전학한 후, 셋째 이모 집에 거주하며 중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매년 서울대를 100명씩 보낸다’던 명문고 전주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전주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유신에 반대하며 전주고 자퇴, 문학 꿈 안고 상경

그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인 1973년은 대통령인 박정희의 독재에 반대한 반유신체제운동이 전국에서 들풀처럼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8월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돼, 9월부터 반독재·반체제를 외치는 대학생의 시위가 거세졌고, 이는 점차 전국 고등학교에까지 퍼져나갔다. 이에 맞서 박정희는 1974년 1월 긴급조치1ㆍ2호를 공포하고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했다. 4월에는 긴급조치4호를 발동해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행동도 금지했다.

정치적 격랑 속에 전주고 1학년이었던 시인은 김지하의 시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폐간 처분 당한 ‘사상계’와 ‘창작과 비평’을 구해 읽고, 김지하나 고은, 황석영, 이호철 등 당시 독재에 반대하던 이들의 문학을 접했다. 학급 ‘홈룸(home room)’시간에 시국관을 발표해 담임선생을 당황하게 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일로 그는 학교에서 ‘요주의 인물’이 됐다.

당시 긴급조치4호에는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위반한 학생을 문교부 장관이 퇴학 또는 정학처분을, 그리고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의 폐교 처분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 때문일까. 교장이 직접 나서 시인의 생각을 돌려보려고도 했다고 한다.

시인은 1학년 겨울방학 직전,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남해 여행을 떠났다. 이미 학교를 그만 둘 결단을 내린 상태였다. 2학년이 되기 직전, 자퇴서를 제출하고 문학을 하겠다는 꿈을 품고 서울로 왔다. 시인은 서울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형 박정근과 함께 생활했다.

노동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 시를 쓰다

▲ 박영근 시인의 첫 시집. <사진제공ㆍ성효숙>
자퇴한 그는 고등학생들로 이뤄진 문학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시를 써나갔다. 이 당시 소비에트 혁명을 빗댄 창작시 때문에 경찰 조사를 받고 가택 수색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김지하의 ‘오적’을 소지한 혐의로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18세이던 1976년, 잡지 ‘학원’ 4ㆍ5월호에 그의 시 ‘눈1’ ‘눈2’가 입선작으로 실렸다.

1977년 가을 무렵, 그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영등포 뚝방촌(양천구 신정동)에 방 한 칸을 구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삶에 깊이 동화하기 시작했다. 인천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토론을 벌이고, 교회 청년회에서 활동하며 교회 회지에 시와 문학비평문을 기고했다.

또 민주화를 바라는 기독교ㆍ재야인사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대학연합문학서클 ‘청청(靑靑)’에 참여해 시 창작활동을 활발히 해나갔다. 고교 중퇴에 보잘 것 없는 노동자 신분이었지만, 그가 민중문학에 대해 열변을 토할 때는 문학평론가들도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 석양녘, 나는 번지수도 없을 법한 박영근 시인의 집을 물어물어 간신히 찾아갔지만 그의 초라한 행색 앞에 내심 놀랐다. 시인의 행색이 저리도 민중적이어도 되는 것인가. 나는 그의 박학다식에 놀랐고 전라도 출신치고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 그의 서울 말씨에 대뜸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이승철 시인의 추모글 ‘문학이라는 이름의 가시면류관 앞에서’ 중에서)

군대를 제대한 1981년은 시인에게 많은 일이 일어난 해이다. 그는 민중문화운동, 민중신학, 학생운동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교류했다. 신촌에서 쌀가게를 운영하며 동인지 ‘말과힘’을 발간하기도 했다. 또, ‘반시(反詩)’(1976년 창간된 시 동인지)에 시 ‘수유리에서’를 발표하면서 비로소 등단했다. 당시 그의 모습은, 등단 직후 박 시인을 만난 시인 이승철이 당시를 회상하며 쓴 글로 가늠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절, 그는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을 만난다.(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