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희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센터장

홍인희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센터장
홍인희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센터장

인천투데이|봄바람이 살랑 살랑 부는 봄이지만 아직 아침, 저녁으로는 찬바람이 불어 따끈따끈한 아랫목이 생각나는 초봄이다. 찬바람이 부는 날이면 온돌이라는 난방문화가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온돌이 강화 마니산 동쪽 묘지사로 추정되는 터에서 발견됐다. 온돌의 원시적인 형태를 사용하다가 고려 후기에 오면 방바닥 전체에 고래(불길과 연기가 통해 나가는 길)를 깐 전면온돌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유적이 발견 된 것이다.

묘지사는 본래 개경에 있었다. 1174년(명종 4) 개경에 있던 사찰의 승려들이 이의방을 반대해 죽이려고 하자 이를 알고 이의방은 보복하기 위해 여러 사찰을 부쉈다. 그 사찰 중에 하나가 묘지사다. 개경에서 묘지사는 힘도 있었으며 어느 정도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원융국사 묘지명에 보면 묘지사에 대한 묘사가 보인다. 고려 현종이 궁궐 동쪽의 묘지사를 돌아보니, 시끄러운 세상과 멀지 않지만 세속의 더러움이 날아들지 않았고, 검푸른 봉우리에 비단 구름으로 덮여있어 사방을 바라보면 비 갠 뒤의 풍경이 (마치) 신비로운 그림이 펼쳐진 듯 했고, 맑은 퉁소 여러 대의 소리 같은 아득한 곳의 짐승 소리가 고요한 밤에 상현(商弦)을 연주하는 듯하여 실로 헌원(軒皇)씨가 (광성자(廣成子)에게) 도를 물었던 (공동산(崆峒山)과 같은) 뛰어난 경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묘지사는 원래 개경 궁궐의 동쪽에 있었으며 풍광 또한 수려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묘지사는 개경에서도 중요 사찰이었기 때문에 고려가 강화로 천도했을 때 옮겨온 사찰 중 하나였다. 강도시기 강화의 사찰은 대부분 개경의 것이 이전된 것이다. 연등회와 팔관회 때 행차하는 봉은사와 법왕사를 비롯해 현성사, 건성사, 복령사, 묘통사, 왕륜사, 묘지사 등 봄과 가을에 정례적으로 행차하는 사원들이 개경에서와 같은 이름으로 지어졌다.

봉은사와 법왕사는 그 국가적 비중을 생각할 때, 천도와 거의 동시에 이전됐을 것이다. 그 밖의 개경시대의 주요 사원이 비록 규모는 축소됐지만 상당수가 지속적으로 건립돼, 1245년(고종 32) 경에는 어느 정도 일단락이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강도시기 묘지사 기록은 고려사에 딱 한 번 나온다. 1264년 6월 7일(음) 원종이 묘지사로 거처를 옮기고, 마리산 참성에서 친히 초제(醮祭:도교의례 중 하나로, 별에 제사를 지내는 것)를 지냈다. 초제를 지내기 위해서 깊은 밤에 제계하고 산에 올라야 했기 때문에 온돌을 시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종은 뜨끈 뜨근한 묘지사의 온돌방에서 밤새 초제를 지낸 피곤한 몸을 잠깐이나마 뉘었을지 모른다.

책 내용에 대한 진위 여부가 논쟁이긴 하지만 ‘속수증보강도지’에 사기리 뒤쪽 초피봉 남쪽 언덕에 묘지사 터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근거로 작년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을 하고 묘지사 터라고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곳은 사기리 이건창 생가 뒤편 마을 끝이다.

묘지사를 포함한 그 즈음 원종의 일정은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에서 펴낸 김성환, ‘강화 참성단 A to Z(글누림, 2022)’에 자세하게 나온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264년 6월 2일(음)에 원종은 봉은사에 갔다. 다음날에는 삼랑성 가궐에 갔다. 1264년 5월 30일(음) 삼랑성 가궐에서는 대불정오성도량을 4개월 동안 열었다는 고려사 기록으로 보아 대불정오성도량에 참석하려고 갔을 것이다.

그리고 7일에 묘지사로 갔다. 묘지사에 도착한 원종은 이곳에서 재계하며 초제를 준비했을 것이다. 초제는 늦은 밤부터 새벽녘까지 별을 제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원종은 7일 오후 또는 저녁에 마니산에 올랐을 것이다.

밤새 초제를 지내고 쉴 틈도 없이 6월 8일(음) 원종은 신니동 가궐로 거처를 옮다. 6월 9일(음)에는 왕이 혈구사에서 대일왕도량을 열었다. 이렇게 힘든 일정을 소화하면서 도량을 연 것은 원종이 같은 해 8월 12일(음)에 몽고로 출발해 12월 22일(음) 강화도로 돌아오는 여정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묘지사터는 올해까지 추가 발굴조사를 진행한다고 한다. 발굴조사 이후 고려 강도시기 온돌의 원형과 역대 왕이 지낸 마니산 초제 등을 뒷받침 할 수 있는 학술 연구도 풍부하게 진행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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