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훈 연구모임 오늘의 상상 준비위원

민주당 “못살겠다. 갈아보자.”

자유당 “갈아봤자 소용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조봉암 ”이것저것 다 보았다. 혁신밖엔 살길 없다“ (1956년 3대 대통령선거 구호)

강화 출신으로 지금 인천 부평구 백마장(산곡동) 인근 정미소를 빌려 선거사무소를 차리고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가 있다.

일제 때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 온갖 옥고를 치렀지만 불확실한 이유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 국회부의장(1950년)과 이승만 대통령 내각 초대 농림부장관(1948년)으로 농지개혁을 이끈 사람. 전쟁 직후 대통령선거에서 평화통일을 주창했던 후보. 이승만 정권이 조작한 진보당 사건(1958년)에 연루돼 1959년 7월 사형을 당한 사법살인의 희생자.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1899년~1959년)선생 이야기다.

(사)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는 다시 쓴 조봉암 평전 ‘자유인의 길’과 작년에 별세한 죽산의 큰 딸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조호정 여사 회고록 ‘바위에 새긴 눈물’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인천시와 인천시교육청, 새얼문화재단, 인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이 후원했다. 평전은 죽산 탄생 120년, 서거 60년, 명예회복 18년을 맞아 죽산을 다시 탐구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죽산 조봉암 서거 60주기 추모제
죽산 조봉암 서거 60주기 추모제

1948년 제헌 위원 그리고 농지개혁

죽산은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 위원에 선출돼 국회에 제출할 헌법 초안을 기초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당시 상황에서 말하기 어려운 무척 ‘현대적인’ 헌법사상을 보여주었다. 임시정부 계승 문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국민’이라는 표현 등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을 정도다.

죽산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됐다. 당시 농림부는 농업 인구와 농업의 산업 비중을 볼 때 매우 중요한 부처였다. 그는 우선 춘궁기 식량위기 타개를 위해 강력한 정부 통제를 규정한 ‘양곡매입법안’을 만들었다. 반발을 설득하기 위해 국내 각지를 다니며 명연설로 농민을 설득하고 신뢰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국민의 식생활에 있어 균등케 하자는 것은 헌법정신에 적합한 것이다.” “자기가 먹을 것을 빼고 팔게 되는 경우에는 정부에다가 팔라, 그것이 정부의 근본정신이다.” “우리 헌법의 기조는 자유주의경제에 두고 있지만 사회 정책적 철학도 가미되어 있다. 나는 통제경제도 필요하며 또 그러할 요건도 갖추고 있다고 본다.”

국민의 균등한 식생활을 위해 일정 수준의 국가통제, 농민에게 강제하지 않고 손해를 끼치지 않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담겨진 정책이었다.

농림부 장관으로서 그는 토지개혁 등 농정의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지주들이 정부로부터 매입한 적산은 자본축적의 토대가 됐다. 대신 농민들에겐 무상에 가깝게 토지를 분배해 지지를 받았는데 이는 한국이 공산화하지 않고 오늘날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바탕 중에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혁신적인 행보는 지주층이 결집해 있는 한민당을 자극해 독직사건으로 고발되고 장관에서 물러나는 배경이 됐다. 하지만 농지개혁법이 세상의 빛을 보는 데 그는 큰 역할을 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비엔 묘비문이 없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비엔 묘비문이 없다.

1959년 사법살인 그리고 2023년 조봉암

농림부 장관에서 물러난 그는 진보 정치인과 무소속 의원들의 지지를 받아 국회부의장에 당선됐다. 곧이어 발발한 6.25전쟁에서 국회부의장으로서 입지와 신뢰를 단단히 쌓게 된다.

피란하지 못한 의원 62명 중 3명이 피살되고 27명이 납북되거나 월북 또는 행방불명되는 와중에도 그는 국회 문서를 챙기는 등 부의장으로서 책임을 다했다. 그사이 아내 김조이 여사를 돌보지 못해 납북되게 하는 비극을 당했다.

죽산의 이런 모습을 지켜본 장택상 당시 부의장이 훗날 “전쟁을 맞이했을 때 그냥 도망가지 않고 조봉암처럼 자기 직분에 충실했던 사람은 없다”며 법조계에 구명운동을 편 일화는 한국 정치사에 유명한 일화다.

죽산은 2대 대통령 선거(1952년)에 낙선한 후 무소속으로 3대 대통령 선거(1956년)에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내걸고 출마해 무려 216만표를 넘게 얻으며 지지율 30%를 기록했다. 그는 이런 지지에 힘입어 진보당을 창당했다.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1958년 그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체포했고 이른바 보안법 위반 ‘진보당 사건’을 조작했다. 이듬해인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사형을 집행했다. 사법살인이다.

현재 서울 망우리공원 소재 죽산 묘비엔 묘비문이 없다. 정부의 독립유공 서훈을 받으면 묘비문을 새로 세울 생각인데 여전히 없는 상태다.

연구모임 오늘의상상 신봉훈 준비위원장
연구모임 오늘의상상 신봉훈 준비위원장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인천 서경정(지금 중구 내동)에 사는 조봉암 씨가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단신 기사를 근거로 추서를 안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죽산의 주소는 소하정(현재 부평)이었고 그만한 성금을 낼만한 형편이 아니었으며 1945년 1월 일제에 구속된 것만 보더라도 부역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업회와 유족의 주장이다. 사법살인에 대해서는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제는 독립유공에 대한 명예회복을 기대한다.

죽산 선생에 대한 자긍심을 널리 선양해야 한다. 특히 인천의 역사와 정체성에도 필요하고 서해평화가 절실한 인천에선 죽산의 정치사상이 지금 더욱 필요하다. 다양한 기념사업을 위해 필요하면 조례 제정도 검토되길 바란다. 들쑥날쑥한 기념사업 보조금으론 사업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의 첫 국회의원 선거구였던 부평 한복판, 일제 강점기 조병창으로부터 미군기지로 이어졌던 영욕의 캠프마켓 공원이 완공되면 그곳에 시민들과 어깨동무할 죽산 조봉암 선생 동상이 세워지길 꿈꾼다. 분명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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