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최근 영화 ‘다음 소희’가 화제가 되고 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기에 영화 자체에 대해 말할 수는 없겠으나 이 시점에 이 영화가 출시했어야 했던 까닭, 주목을 받는 그 맥락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영화가 2017년 SBS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 방영됐던 청소년 노동자의 자살에서 모티프를 얻었음을 고려해 이 내용을 되짚어보기로 하자.

단 2017년 당시 청소년 노동자 관련 업무 현황이 해당 프로그램으로 이미 고발됐음에도 불구하고, 5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사건을 영화로 마주한 우리가 이것을 ‘반성해야 하는 일에 대한 상기’로서가 아니라 여전히 ‘고발’로 받아들이는 까닭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프로그램 방영 내용을 보면, 2017년 당시 자살한 청소년 A씨는 직업인 전문 양성을 목표로 하는 특성화고등학교 출신으로 콜센터에서 근무했다. 콜센터에는 ‘해지 방지팀’이 있는데 문자 그대로 서비스 해지를 원하는 고객을 설득하는 업무를 진행한다.

방송에 출연한 해당 업무 관계자의 말에 들어보면, 해지를 원하는 고객은 오랜 시간 서비스에 불만을 지닌 상태이기 때문에 직원과의 상담 과정에서 불쾌감과 분노를 쏟아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한편 해지를 방지하지 못한 직원은 실적을 채우지 못했다는 질책을 받게 되며, 이러한 업무상의 고충을 토로한다 한들 관리자에게 모두 보고되고 감시되기 때문에 업무 환경의 개선 또한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A씨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폭언을 쏟아낸 고객 또는 오로지 실적만을 목표로 삼는 회사일까.

그렇다. 그들은 이 죽음에 연루되어 있다. 그러나 단순히 개인의 결함, 회사의 윤리적 문제로만 이 사안을 좁혀 보아서는 곤란하다. 기실 ‘감정 노동자’를 향한 폭언 문제는 2018년 ‘감정노동자 보호법’으로 나름의 해결 방안이 마련된 적이 있다.

그런데, A씨의 사망과 흡사한 문제들이 여전히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폭언 금지’는 필요한 제재임에도 궁극적인 처사가 될 수는 없다는 의미로 해석될 법하다. 한편 ‘기업-노동자’의 관점에서 볼 때, 회사를 대변하는 사람도 노동자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가 노동자의 권리를 억압한다는 논리로 흘러가기 십상인 이 부분은 바로 그런 연유로 노동자 개개인 또한 타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 연루돼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궁극적으로 그 노동자는 기업체를 대변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근본적인 차원의 착취 구조 속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A씨의 죽음에는 학교와 교육 차원의 문제 또한 연관돼있다. A씨가 다녔던 특성화고교는 직업 능력의 성취를 독려하는 교육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해당 학교는 ‘취업률 백 퍼센트’를 내세우고 고수함으로써 그 존립의 정당성을 인정받고자 했다. (여담이나, 취업률을 성공적 교육의 지표로 삼는 이런 풍경은 최근 여느 대학에서라도 볼 수 있는 듯하다. 특성화고교에서 두드러진 문제이긴 하나 그곳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의미다)

이런 시스템 한 가운데 놓인 특성화고교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직군으로 배정받는 대신, 미래를 볼모 잡힌 채 ‘값싼 노동력’으로 취급되고 있다고 프로그램은 지적한다. 그렇다면 A씨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학교와 교육 시스템일까.

물론 그렇다. 사회에 기여하는 노동자가 돼 한 사람 분의 몫을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오랜 자본주의적 언명 위에서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주체 생산의 이데올로기는 조금 더 ‘유능한 인재’를 ‘일찍부터’ 길러내는 교육의 합리성까지도 주장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일면 어떤 직군에선 반드시 현장에 투입해야만 배울 것이 있을 수 있으나, 교육은 그 ‘기능’ 자체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다. 직능 수행으러 어떤 인간다움을 실천해나갈 수 있는가를 교육은 물어야 하기에, 교육에서 직능 개발 자체를 최우선하는 것은 충분치 못한 실천일 뿐 아니라 교육의 본질적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관련해선 노동자와 분리된 개념으로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포함하는 개념인) ‘아동’을 상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이전, 아동이 ‘작은 어른’ 즉 예비된 노동자로 인식됐음을 다음의 질문으로 고쳐 읽어본다.

미래 노동을 예비하고 수행해야 하는 주체로서 청소년을 바라보는 일은 어째서 위험한가. 그것은 그러한 관점으로 (생애주기를 종합한 것으로서) 인간의 삶 또한 조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즉 청소년 노동자의 죽음이 문제인 것은 ‘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벌어져서가 아니라, (자신 또한 언제든지 그 자리에 기입될 수 있을) ‘약자’를 착취하는 데 제도가 모두를 적극적으로 가담시키고 있으며 그러한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채로 이 모든 것을 수행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놓여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실습생을 값싼 노동력으로 부리게끔 만드는 제도적 결함과, 그 결함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이 모든 ‘노력’들이 청소년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의 방기는, 아동 청소년 시기를 거쳐 어른이 되고 늙어가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며 그들의 삶의 기준은 또다시 약자인 청소년 노동자를 착취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청소년 노동자, 즉 약자의 문제를 보다 자신의 일로 끌어 당겨 생각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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