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지형 마중물 회원
한나 아렌트는 무엇 됨(whatness)과 누구 됨(whoness)이라는 개념으로 정치를 설명한다. 무엇 됨은 시장에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다. 좋은 학벌, 좋은 아파트, 좋은 자동차를 가진 사람을 잘난 사람으로 평가한다. 즉 상품으로 인간을 이해한다. 반면 누구 됨은 인간을 다양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고, 고유성과 개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본다. 즉 누구 됨은 사람들 간의 차이에 주목한다.

무엇 됨으로부터 소외된 나‘들’

나는 교육학과 박사과정에 들어오기 전에, 특수목적고등학교를 보내는 입시학원의 강사로 8년 동안 일했다. 사실 남들보다는 조금 더 많은 연봉을 받았고, 덕분에 사치가 주는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었다.

내가 다닌 학원은 특목고를 보내기 위한 철저한 진학 위주의 ‘입시공장’이었다. 이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은 특목고 입학 수로 결정됐다. 이 속에서 나는 그럴 듯한 이유를 들이대며, 학생들이 특목고를 가야 하는 동기를 불어넣었다.

특목고에 가야 일반고를 다니는 학생들보다 더 좋은 대학을 가고, 더 좋은 대학을 가야 더 좋은 직장과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설파했다. 많은 사례를 열거하면서. 학생들은 물론이고 나도 이것을 신화처럼 믿었다. 그리고 나의 일이 매우 보람 있는 일일 수도 있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어느 해에 내가 다른 학생보다 더 정성을 쏟았던 학생이 외고 입시에 응시해서 떨어졌다. 성적이 우수했던 학생이기 때문에 나는 그 학생이 떨어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 학생도 자신이 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낙방의 충격에 입이 돌아가 버렸다. 입시가 끝나고 며칠 뒤 그 학생의 어머니가 나를 찾아와 2시간 동안 하염없이 울기만 하다 집으로 돌아갔다.

처음으로 나는 나의 역할을 고민했다. 나는 ‘아이들이 이미 선택해서 온 학원이니까 … 아이들의 목표는 외고 합격이니까 어떻게 합격할 수 있는지 방법만 가르쳐주면 돼’라고 했지, 다른 것을 소통하고 공감하려하지 않았다. 아이의 좌절과 슬픔 앞에서 나는 생각했다.

특목고에 ‘올인’하다 실패한 그 아이나 무엇 됨을 위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도록 강요하는 나나 모두 이 사회가 만든 스펙의 기계들은 아닐까? 스펙의 무엇 됨이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피로하게 하고 착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무엇 됨으로부터 무수히 소외된 나‘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정치의 회복과 누구 됨

나는 그 사건 이후부터 내가 다니는 학원이라는 직장이 정말로 싫어졌다. 그래서 다른 길을 찾은 것이 대학원 진학이었다. 이제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좀 더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 학교로 가면 아이들의 성적, 스펙 쌓기보다 아이들의 누구 됨을 격려하는 선생님이 되자! 새로운 갈래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은 대학교도 학원과 같이 입시위주의 교육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학은 또 다른 무엇 됨을 위한 공간이고, 더 나은 상품을 위해 내가 프로젝트도 하고, 논문도 쓰고, 학회도 나갈 것을 명령했다. 이 속의 생존기는 그 아이가 특목고에 가는 것처럼 경쟁과 스트레스에 항상 노출돼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무엇 됨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 아이처럼.

무엇 됨의 기계에서 누구 됨의 세상으로 나아가고자했던 나는 철저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무엇 됨이 있는 땅은 나 혼자의 지혜로운 선택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님을 깨달았다. 협력으로 무수한 외로운 나‘들’이 자신이 기거하는 이 땅의 제도와 인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 됨의 세상 속에 살 수밖에 없다.

누구 됨이 무엇 됨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 됨의 땅에서 누구 됨의 공간으로 이사 가는 것에 있지 않다. 나의 경험은 새로운 갈래길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을 새로운 갈래의 인식을 가진 소외된 나‘들’이 자각하고 개입해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고 말해 주고 있다. 이제 나는 무엇 됨의 ‘스펙의 정치’에서 누구 됨의 ‘차이의 정치’를 갈망하는 무수한 나‘들’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꿈꾼다.

※ ‘마중물칼럼’은 사단법인 ‘마중물’ 회원들이 ‘상식의 전복과 정치의 회복’을 주제로 토론하고 작성한 칼럼입니다. 격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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