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접경지를 가다①] 포격의 상흔 안고 살아가는 연평 주민들

(편집자 주)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사건, 대북단체 전단지 살포와 북한의 조준타격 논란 등. 이명박 정부 내내 남북관계가 냉각돼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북한과 맞닿아 있는 인천은 이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 대선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지금, <부평신문>은 창간9주년 특집으로 북한과 접해있는 인천의 접경지를 찾아가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었다.

▲ 연평도 선착장에서 바라본 소연평도(가운데). 연평도는 2년 전 한반도의 화약고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 연평도 내항에서 바라본 연평도 시내.

서해는 냉전과 분단의 바다였다. 인천과 맞닿은 서해는 여몽전쟁ㆍ신미양요ㆍ러일전쟁의 전쟁터였다. 수도 서울과 인접한 인천(강화 포함)을 누가 점령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좌우됐기 때문이다.

1953년 휴전을 하면서 서해의 해상경계선 문제를 합의하지 못해, 휴전 협정 이후에도 서해는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999년, 2002년 그리고 2009년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고, 2010년 11월 23일에는 북한군이 연평도를 포격했다. 북방한계선(NLL: northern limit line)로 인한 분쟁은 이어지고 있다.

연평도는 공사 중 … 뭍 인부만 700~800명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4일, 대연평도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는 높은 파도로 인해 뜨지 않았다. 가뜩이나 조용한 섬에는 비바람 소리 외에 들리지 않을 정도다.

연평도는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뱃길로 2시간 30분쯤 달려야 도착할 수 있다. 2일 연평도를 들어가기 위해 여객터미널을 찾았지만, 1일 연평도 배편이 결항되는 바람에 배편이 조기에 만석이 돼 탈 수 없었다. 수 십명이 발길을 돌려야했다. 연안터미널 관계자는 “연평도 포격 이후에 연평도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복구공사 인부와 군인 등이 많이 찾아, 예약하지 않으면 종종 배편을 구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예정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연평도는 늦가을 분위기를 느끼기보다는 과거 새마을운동을 연상시킬 정도로 곳곳이 공사 현장이었다. 뭍에서 온 공사 인부와 70~80대 노인들만이 눈에 띄었다. 꽃게잡이철이라 낮에는 더욱 조용했다. 종종 젊은 주부들과 아이, 군인들이 오가기는 했지만 도심의 여느 길가서 느끼는 생동감은 덜했다.

두 집 건너 한 집은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짓고 있었다. 공사 장비와 인부를 실은 트럭, 굴착기 등이 분주히 다녔다. 군부대와 학교 개ㆍ보수공사도 진행 중이었다. 포격 이후에는 대피소 수 십 곳이 현대식으로 개ㆍ보수됐다. 파출소 직원과 주민 등에 따르면, 뭍에서 온 인부가 700~800명 정도 된다.

▲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후 자원봉사자들은 연평도 곳곳에 벽화를 그려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연평도 면사무소 인근 한 골목길.

▲ 2010년 11월 23일 북방한계선 너머 북의 옹진반도에서 날아든 포탄에 의해 망가진  주택. 옹진군은 피폭된 주택 바로 옆에 안보교육장을 신축 중이다.
빈 방 없을 정도로 ‘경제 특수?’

숙소를 잡기 위해 민박집을 돌아다녔지만, 인부들의 장기 투숙으로 인해 민박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한 민박에서는 인부들이 뭍으로 나갔다며 인부들이 머물던 숙소를 소개하기도 했다. 숙소에는 인부들의 옷가지와 짐이 방안 곳곳에 쌓여 있었다. 이 숙소도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70대 노부부가 차지해버렸다.

4일 오후 6시께 민박과 식당을 함께 운영하는 대성식당은 공사 인부들이 저녁을 먹기 위해 몰려들었다. 저녁을 먹은 인부 20여명이 빠져나가자, 10분 만에 다시 인부 10여명이 들어왔다.

9개월째 개성식당에서 일한다는 50대 주부는 “인천 신흥동에서 왔는데, 달에 3박4일만 인천으로 나간다”며 “빈 방도 없을 정도로 경기가 좋다”고 말했다. 민박집 몇 곳을 더 방문했지만, 방 입구에 인부들의 작업화만이 가득할 정도로 빈 방을 찾기가 어려웠다.

연평도 포격 이후 정부는 서해5도 지원 사업으로 총1217억원을 지원했다. 2010년과 2011년에만 주민대피시설 구축에 540억원, 생활안정자금 107억원, 주택복구에 116억원, 안보 교육장 건립에 6억원 등을 각각 지원했다. 올해에도 주민생활안정 사업 190억원, 대피체계 강화 37억원, 일자리와 소득창출 기반 구축 75억원, 주거환경개선 44억원, 관광개발과 국제평화거점 육성 사업 21억원 등, 모두 426억원이 지원될 예정이다.

미영민박 주인은 “올해 봄부터 공사가 많아, 민박 구하기가 힘들다. 예약하지 않고 오면 큰 낭패를 본다. 예약 손님이 있는데, 5시 넘어서 와보라”고 말했다.

음식, 숙박업 등이 재미를 본 반면, 연평도 주민들의 주 수입원인 꽃게잡이는 올해 흉년이었다. 5일 연평도 선착장에서 만난 선원들은 "가을철 꽃게가 없다. 예년에 비해 절반도 못 되는 어획량"이라고 걱정을 털어 놓았다. 

▲ 연평도 종합운동장 인근에 위치한 4호 연평대피소. 신축된 대피소 철재 문의 두께가 20cm를 넘었다.
포격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주민들 … “정부 지원 부족”

연평도 포격이 발생한 지 어느덧 2년이 돼가고 있지만, 주민들에게 포격 사건은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다. 트라우마(외상성 신경증)로 고생하는 이가 적지 않다.

고향 경기도 광주에서 시집와 30년 넘게 살고 있는 한 주부는 “그 때를 지금 생각해도 자꾸 눈물이 난다. 6.25를 겪은 노인들은 포격 당시 몸을 바들바들 떨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북한은 더 못 믿지만, 남한 정치인 말도 못 믿겠다. 내 힘으로 잘 살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한 “포격 당시 한 달은 사우나에서 지냈고, 한 달은 양곡아파트에서 3~4가구가 한 집에서 지냈다. 당시 육지 사람들은, 연평도 사람들이 아파트 한 채씩 받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택시 기사와 많이 싸웠다.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연평도가 내 고향이 됐고, 내가 살아갈 곳이라 다시 찾았다”고 연평에 대한 애증을 털어놓았다.

연평 포격 사건 후 부모님이 사는 연평도로 다시 들어온 김아무개(31)씨는 “포 쏜다고 방송하면 어른들은 불안해한다. 연습을 해야 하지만, 불안감만이라도 없앴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평도로 시집와서 두 아이를 키우는 주부 김아무개씨도 “어제(=2일)도 사격훈련을 했는데, 훈련 전에는 방송하는데, 방송을 못 들은 상태에서 훈련이 진행됐다. 순간 긴장했다. 나도 병적으로 되는 것 같다”고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어 “연평 포격 당시 막내는 유치원 다니고, 큰 아이는 초등학교 다녔다.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불안감이 더 큰 거 같다”며 “아이들의 심리 상태를 진단해보지 못해서 사실 걱정”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막대한 재원을 지원했지만, 연평 주민들은 정부의 지원이 턱 없이 부족하다고 인식했다.

주민 일부는 “포격 사건 후 정부에서 각종 공사를 하지만, 주민들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정주비로 월 5만원이 전부다. 지금은 공사 때문에 숙박과 음식 장사가 잘 되지만, 이들이 빠져나가면 생계가 걱정”이라고 정부 지원에 불만을 드러냈다.

5일 연평도 선착장에서 만난 60대의 한 선주는 “이 선착장이 지은 지 몇십년인데, 개보수가 안 됐다. 연평도를 위해서는 선착장을 개보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 지난달 21일부터 23일까지 백령면 사곳해변에서 조업 중인 중국 어선들. 연평도 역시 중국 어선에 의한 피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꽃게가 9월에 반짝 많이 잡혔다가 10월 들어서는 전멸 수준이라 어민들이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사진제공ㆍ옹진군>
“뜨내기 기자들이 연평도 민심 왜곡”

이달 24일 개관 예정인 연평도 안보교육장 건립 신축공사를 위해 한 달 전에 들어왔다는 공사 관계자는 “한 달째 살고 있는데, 주민들이 외지인은 사람 취급도 제대로 안 한다”고 서운한 맘을 털어놓기도 했다.

섬 지역이라는 특성에다가 포격 사건 이후 물밀 듯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기자들에 대한 경계심도 내포된 것으로 보였다. 주민들은 기자들의 취재에 거부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한 식당 주인은 “뜨내기 기자들이 지겹다. 묻지도 말아라. 기자 수 십 명이 와서 매번 비슷한 것만 물어보고 갔다”며 “나에게 물어봐도 난 말하기 싫어. 다른 기자들은 포격 맞은 집에서 사진 찍고 갔으니, 거기나 가서 사진 찍고 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40대로 보이는 한 주부도 “아닌 거는 아니라고 써 달라. 기자들이 취재는 열심히 하고 정부에서 지원하는 것만 보도한다. 좋은 것만 쓰지 말고, 연평도 주민의 어려움도 제대로 보도하라”고 말했다.

연평도 선착장에서 어묵 장사를 하는 50대 여성도 “연평도 사고 나고 기자, 군인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더니 언제부턴가 잊혀졌다. 조만간 2주년이라고 또 물밀 듯이 들오겠지, 기자들 들어와서 연평도 정보만 외부로 유출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군부대 공사를 위해 두 달째 머무르고 있다는 일용직 노동자는 “나도 섬(남도) 출신이지만, 이곳 주민들은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특히 심한 것 같다. 2주년이라 기자들이 조금씩 들어오는데, 취재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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