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김현철 기자│설 명절 사흘 전 지난 18일 민주노총 조합원이 믿기 어려운 소식과 사진을 보냈다. 민주노총을 압수수색 한다는 소식은 그럴 수 있겠다 싶었지만, 압수수색에 나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 그들의 등판엔 ‘국가정보원’이라는 글씨가 크게 박혀있었다.

윤석열 정부 들어 국정원의 역할이 확대되더니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에서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과거 원훈대로 돌아간 국정원 직원들이 '양지'로 대거 등장했다. 스스로를 철저히 숨겨야 한다던 국정원 직원들은 스스로를 카메라 앞에 대놓고 드러냈다.

압수수색이 벌어진 곳은 1평 남짓 민주노총 사무실이었다. 사무실이 소재한 건물 밖에 경찰 병력 700여명과 대규모 소방 인력이 대기했다. 현장에 있던 민주노총 조합원이 보내준 사진은 그야말로 대규모 작전이었다.

보수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민주노총 간부, 국보법 위반 혐의’, ‘민노총 간부 국보법 혐의 압수수색’ 등 제목을 뽑고 ‘양지’에 등장한 ‘국정원 수사관’ 사진을 크게 실었다. 일부 언론사 취재진은 국정원이 도착하기 전부터 압수수색 현장에 도착했다는 후문도 들린다.

‘압수수색 보도에 등장하는 사진은 수사관이 박스를 들고 건물 밖을 나오는 장면일 수밖에 없다. 사전에 공개하는 압수수색은 없으며, 언론인은 압수수색 사실을 듣고 현장에 가기 때문에 그 장면밖에 담지 못 한다’고 했던 선배 언론인의 강연이 머리를 스쳤다.

스스로를 그토록 감추려했던 국정원 직원들이 ‘대공수사의 원칙인 밀행성’과 ‘압수수색은 비밀리에 진행해야한다'는 원칙까지 깨고, 요란법석을 떨며 ‘국가보안법’이라는 단어를 꺼내 들고 ‘양지’에 대거 등장한 이유가 뭘까.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권력기관이 공안범죄 수사 명목으로 국내 정치에 개입할 여지를 차단하자는 목적으로 ‘대공수사권의 경찰 이양’을 공약했다.

이후 2020년 민주당이 주도해 국회에서 국정원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며, 국정원은 대공수사권을 내년 1월 1일부터 경찰에 이양해야 한다. 당시 국민의힘은 ‘대공수사권 경찰 이양은 국정원 존재 이유를 없애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하지만 당시에 국정원이 서울시공무원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증거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정원은 ‘간첩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정확히는 '간첩을 생산해서라도 조직을 유지하는' 공작기관이라는 오명을 썼다. 그렇게 국정원법이 개정됐다.

압수수색이 있기 6일 전 여당인 국민의힘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은 “간첩은 국정원이 잡는 게 맞다”며 “내년 1월부터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되게 한 방침이 철회돼야 한다”고 언급했다.

대통령실도 국정원이 간첩 수사를 계속 할 수 있게 상설 합동 수사단을 신설하는 안을 검토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8일 국정원이 민주노총을 향해 벌인 압수수색이 ‘대공수사권 경찰 이양’을 앞두고 ‘대공수사권’을 지키기 위해 벌인 촌극이 아니길 바란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원훈은 국정원의 전신인 박정희 정부의 중앙정보부의 부장을 지낸 김종필 전 총리가 정했던 첫 원훈이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며 바뀌었다.

이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권을 거치는 동안 사라졌던 원훈이 23년 만에 복귀했다. 이를 두고 김규현 국정원장은 “초심으로 돌아가 정부기관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국정원 전신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공안 사건은 ‘인혁당’, ‘민청학련’, ‘동백림’ 사건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김 원장이 말한 초심이 중앙정보부가 벌였던 행태로 회귀가 아니길 바란다. 국정원의 양지는 국정원이 국민 앞에 떳떳할 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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