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대 교수의 전통문화 기웃거리기] ③

인천투데이=서영대 교수|한국사를 공부하다 보면,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했더라면’이란 말을 종종 듣는다. 여기에는 고대 삼국 중 가장 강국이었던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 현재의 한국은 더욱 부강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며, 최소한 만주라도 우리 땅이지 않겠느냐는 바람이 담겨있다. 한국인이라면 이러한 가정은 누구나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역사학에선 가정을 삼간다. 역사에선 인과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즉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돼 또 다른 결과를 낳으면서 역사는 전개된다고 보기 때문에, 그 사이에 가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학의 입장에서 올바른 물음이란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이 아니라, ‘왜 고구려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가’이다.

물론 이런 물음에 회의적일 수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668년인데, 지금 와서 새삼 1400년 전의 사실을 들춰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회의이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은, 또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을 가정하는 것 보다, 있었던 사실로 교훈을 찾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 멸망의 원인 문제는 그 좋은 예일 것이다.

고구려 멸망의 원인은 내우외환

한 국가가 망하는 원인으로 흔히 내우외환을 든다. 이 말은 고구려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외환이란 고구려가 중국의 통일제국으로 새롭게 등장한 수·당과 오랫동안 사투를 벌인 사실을 말한다. 고구려와 수·당 간의 전쟁은 동아시아 패권의 향방을 가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로가 물러설 수 없는 것이었다.

이때 고구려는 살수대첩이나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로 침략군을 물리쳤다고는 하지만, 고구려 영토가 전쟁터였기 때문에 실로 고구려의 피해는 막대했고, 또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국력도 소진됐다.

그 결과 668년 9월 12일(양력으로는 10월 22일) 나당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서 고구려는 멸망하고 만다(근래 당나라 군대가 오합지졸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최강으로 여기는 고구려가 당나라 군대에 의해 멸망됐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 말을 할수록 우리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물ㆍ풍속도, 사신도 벽화(약수리고분).
인물ㆍ풍속도, 사신도 벽화(약수리고분).

한편 내우란 고구려 지배층의 분열이다. 고구려는 4~5세기 광개토왕·장수왕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왕권 강화 과정에서 귀족세력에 대한 무리한 숙청에다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거듭되면서 왕권은 실추됐고, 수상인 대대로라는 관직도 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싸워 이긴 귀족이 차지하는 지경이 됐다.

642년 연개소문의 쿠데타도 귀족세력 간의 권력 다툼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쥐는 듯했으나, 그의 사후 연개소문의 아들들 간의 내분으로 다시 고구려는 분열한다. 분열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하는지, 고구려 말에는 불교와 도교가 갈등을 일으키면서 사회 분열을 조장했다.

내우외환은 서로 상승작용을 하면서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고 갔다. 나당연합군에 의한 평양성 함락이 지배층의 적전분열 때문이란 것도 바로 이런 사실을 반영한다.

고구려 고군벽화의 사신도

이런 정도는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여기선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가 그것이다. 사신이란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 북쪽의 현무라는 네 가지 신령한 동물을 말한다.

이 중 특이한 것은 현무인데, 거북과 뱀이 얽혀있는 모습이다. 얼핏 보면 거북과 뱀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 동물이 짝을 이룬 것이다. 거북은 암컷만, 뱀은 수컷만 있으므로, 이들이 짝을 이뤄야만 종족 보존이 된다고 여긴 중국 고대 생물학의 지식을 반영한 것이다(이 때문에 14세기 무렵부터 중국인들은 사람을 거북이나 자라에 비기는 것을 큰 모욕으로 여긴다고 한다. 어머니가 불륜으로 낳은 자식이란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신이란 원래 천문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해와 달을 비롯한 천체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하늘에 좌표를 설정했다. 28수가 그것인데, 28수는 하늘의 적도 또는 태양의 길인 황도 주변의 28개의 별자리를 가리킨다.

이로 인해 천체가 하늘의 어느 지점, 즉 28수 중 어느 별자리에 접근해 있는지로 천체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이 28수를 동서남북 사방으로 나누면, 방위마다 7수씩이 되는데, 이 7수를 연결하면 사신의 형상이 된다고 봤다. 대단한 상상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신의 역할은 하늘의 사방을 수호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지상에서도 사방을 지킨다고 여겼다. 군대가 행진할 때, 전후좌우로 사신을 그린 깃발을 세워 군대를 지키고자 한 것도 이러한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또 풍수지리설의 좌청룡 우백호라는 개념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바로 이 사신 그림이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나온다. 고구려 고분에 벽화가 등장하는 것은 4세기 무렵부터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신도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인물이나 풍속을 그렸다. 무덤 주인공의 초상이나 사냥 그림, 씨름 그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4세기 말부터 인물·풍속도의 한쪽에 사신 그림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조그맣게 그리다가 점차 비중이 커지면서 인물·풍속도를 능가하고, 마침내 6세기부터는 사신도가 무덤 네 벽 전체를 차지한다. 벽화의 주제가 인물ㆍ풍속도 → 인물ㆍ풍속도 및 사신도 → 사신도로 전개됐다는 것이다.

그림의 수준으로 볼 때, 고분벽화는 후대로 갈수록 그림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인물·풍속도는 치졸하다. 원근법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아 사냥하는 기마무사가 사냥터인 산보다 훨씬 큰가 하면, 사람의 크기도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2~3배 차이가 난다. 사실감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사신도 벽화(강서대총).
사신도 벽화(강서대총).

이에 비해 마지막 단계의 사신도는 사실적이며 생동감이 넘치면서, 고구려 회화의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사신이란 관념은 비록 중국에서 나온 것이지만, 사신도가 무덤의 네 벽을 채운 것은 고구려만의 특징이다.

흔히 말하기를 미술의 수준이 가장 높을 때가 그 나라의 전성기라고 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고구려는 가장 전성기 때 멸망한 셈이 된다. 그래서 고구려는 안팎의 모순이 누적된 결과 서서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멸망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림의 수준이 아니라, 그림 속에 들어있는 정신이다. 사냥 그림이나 씨름 그림, 그리고 전투 그림 같은 인물·풍속도는 그림의 수준이 상당히 치졸하지만. 그 속에 고구려 사람들의 진취적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에 비해 사신도는 그림의 수준은 높지만 그 이면의 정신세계에는 문제가 있다. 사신은 사방에서 침입해오는 나쁜 기운으로부터 중앙을 지키는 신령이다. 따라서 무덤의 네 벽에 사신도를 그린 이유는 무덤 가운데 있는 무덤 주인공을 지키기 위해서라 할 수 있다. 뻗어나가기 보다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자는 것이다.

벽화고분과 고구려의 멸망

벽화고분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력이 소요됐을 것이다. 무거운 돌을 운반해 와서 일정 크기로 다듬어 조립하고, 값비싼 물감(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했음)에다가 많은 화가들을 동원해 그림을 그리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벽화고분에는 아무나 묻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왕을 비롯한 당대 최고 신분을 가진 자만이 묻힐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지금까지 고구려 고분은 1만기 이상이 알려져 있지만, 벽화고분은 100여기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구려의 지배층들이 후대로 가면서 진취적 기상을 상실하고, 점차 현실에 안주하면서 그간 쌓아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급급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 귀족의 정신세계가 이렇게 변하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고구려는 중원의 세력이 한반도로 통하는 교통로 상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건국 당초부터 외부세력과의 투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5세기 무렵부터 동아시아 강대국들 간에 세력 균형이 이뤄지고 무장평화가 계속되면서, 고구려도 일단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다. 밖으로부터의 위기가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고구려 귀족들의 에너지는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돌려지는 것 같다.

그 결과 밖으로 뻗어나가는 대신, 그간 구축한 자신들의 기반을 지키는 데 급급해한다. 나아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국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당 연합군에게 평양성 문을 열어주는데도 서슴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는 그림의 수준이 높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임이 틀림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이러한 고구려 최고 지배층의 자기 생존에만 급급한 소극적인 의식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닌 것처럼, 고구려의 멸망도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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