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석 인하대박물관 학예연구사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지금은 다소 식상하게 들리지만 이 말은 참 좋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잊지 말자는 뜻인데 몸과 마음을 다쳐가면서 무언가를 지킨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또 그런 희생자들을 해마다 잊지 않겠다는 의지도 쉽게 이어나가기는 힘든 일이다. 우리나라는 ‘호국 보훈’의 의미가 ‘6.25’와 통하는 경우가 많은데, 국군의 위용을 되새겨보자고 만든 날이 10월 1일 국군의 날이다.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38선을 통과해 ‘북진’하던 날이 이날이라고 한다.

인천에는 ‘호국’한 분들을 추모하는 대표적 공간이 한군데 있으니 바로 수봉산 정상에 있는 인천광역시현충탑이다.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현충 시설이고, 시에서는 매년 6월 6일 이곳에서 현충일 추모행사를 연다. 본래 한국전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탑은 1953년 당시 만국공원, 즉 지금의 자유공원 기슭에 세워져 있었다. 경기도 지역 전몰장병 600여명의 위패도 함께였다.

후에 중구에 있던 해광사에 일부 위패가 옮겨진 후, 1954년 10월 30일 인천고등학교 학생들이 이곳에 있던 전사자의 위패를 가슴에 한 주씩 안고 시가를 행진, 도화동에 있는 쑥골 뒷산에 안장했다. 모두 300여 주였다. 어린 학생들이 전몰장병들을 가슴에 안고 천천히 거리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을 것 같다.

그 후 이들이 묻힌 이곳 군인묘지는 1968년 국립묘지로 이장될 때까지 철마다 추모 행사가 열리는 장소가 됐다. 그리고 1972년 8월 15일 수봉산 꼭대기에 현충탑이 들어서면서 수봉산은 새로운 충혼의 상징터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재밌는 사실은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승학산 주변에서 발견돼 옮긴 곳도 수봉산 기슭이고, 개항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중국인 묘지가 개항장 방면으로부터 이장된 곳도 과거 선인고등학교 주변이었다는 점이다. 중국인 묘지는 지금은 인천가족공원로 다시 옮겨졌지만 그것이 육군 중장 출신 백인엽이 선인학원을 설립해 학교를 확장하면서부터라고 하니 도화동 지역이 갖고 있는 전쟁과 죽음과 추모의 상징성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도화동은 본래 쑥골과 도마리, 두 마을이 정착해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쑥골의 한자식 이름인 화동과 도마리의 앞 글자를 하나씩 따서 도화동이 됐다. 그중 도마리는 한자로 ‘도마(刀馬)’, 혹은 ‘도마(道馬)’라고 쓴다. 칼[刀]과 말[馬], 어찌 보면 죽음과 전쟁을 상기시키는 이러한 단어들은 공교롭게도 먼 훗날 도화동이 갖게 되는 장소적 특성, 즉 추모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상기시키니, 인간 세상을 주무르는 역사의 손길이 참 얄궂다.

‘도마(道馬)’는 또한 ‘도마교(道馬橋)’라고도 했는데 ‘말이 지나다니는 다리가 있었다’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쑥골과 도마리 사이는 넓은 농경지였다. 그 한가운데를 하천이 흐르고 후에 하천과 나란히 평야를 가로질러 경인철도가 부설됐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화동 일대는 공업지대로 지정돼 전쟁 수행을 위한 배후 도시로 주목받았고, 광복 후 개통된 주인선은 미군의 화물 수송로 역할을 맡았으니 ‘길[道]’ 또한 훗날 도화동이 겪게 되는 지역의 운명과 무관해보이지는 않는다.

이러한 변화를 감지했던 걸까. 도화동 북쪽은 본래 인천대학교가 들어서있던 언덕부터 인천교삼거리까지가 해안선이었는데 그 너머 바다 한가운데에 ‘노구도’라는 섬이 하나 있었다. 우리말로 풀면 ‘할미섬’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할미산’이나 ‘할미섬’은 마고할미로 대표되는 거인설화와 관련돼있고, 마고할미는 섬이나 특정 모양의 지형을 만들거나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정도로 여기던 대상이었다. 할머니가 지켜주던 마을이 또한 도화동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지역을 상징하던 대표적 지명은 ‘쑥골’일 것 같다. ‘벼 화’자를 써서 ‘화동(禾洞)’이라고도 쓰는 이 단어는 마을 앞에 있던 넓은 농경지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하다. ‘벼 마을’이 본래 도화동이 갖고 있던 전통 마을 공간의 본모습이라는 거다.

두레와 농경의 전통이 있고 이를 토대로 한 교류와 놀이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한 마을이 전쟁과 공업화의 길을 걸으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해갔다. 과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곳에서 무엇을 되찾는 일은 요원해보이지만, 도시를 새로 디자인하려는 시도가 계속되는 요즘, 기억에서 잊힌 마을 찾기가 종이 위에 처음 선을 긋는 일이 돼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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