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해숙 마중물 이사장
‘마중물 칼럼’은 지금까지 상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된다는 기본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왔다. 이것은 상식의 주체가 있고, 상식을 생산하는 제도와 철학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어떤 사람들은 이 상식으로 인해 이득을 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상식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상식은 ‘중립적 당파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중립을 가장했지만 실제로는 누군가에 더 유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상식은 그 안에 누군가의 폭력을 담고 있고 누군가에 대한 압제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복지는 누구에게나 좋은 것인가? 언뜻 보기에 그럴 것 같다. 사회복지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더 좋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이 목적을 달성하는데?’라고 묻는다면 백가쟁명식의 해답이 나올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당파적인 대답들이 경쟁한다. 사회복지의 두 견해인 잔여주의와 보편주의는 실상은 계급 또는 계층 간의 소득이전을 둘러싼 상이한 견해이고 갈등이다. 본 글에서는 사회복지사에 대한 두 가지 상식을 분석함으로써 이를 드러내고자 한다.

사회복지사는 전문가인가, 노동자인가?

흔히 사회복지사를 전문가라고 한다. 이때 주로 동원되는 질문이 ‘사회복지사는 전문가인가, 노동자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문가 아니야? 노동자는 아니잖아!’ 하고 답변할 것이다. 이 답이 쌓여서 사회복지사는 전문가라는 상식과 신화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 질문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무시무시한 저의를 담고 있다. 첫째, 노동자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전제를 암암리에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도배공, 보일러공, 미장공이 하는 일이 전문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쉬워 보이는 도배도 도배공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엄청난 시간이 들고 결과도 변변치 않으리라.

둘째, 이렇게 되면, 사회복지사는 노동조합을 만들 자격을 박탈당한다. 우리사회는 전문가가 노조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상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전문가는 중립적이라는 신화와 연결되기도 한다. 객관적, 과학적으로 사회를 이해하는 사회복지사는 탈정치화되고 결국 행정 합리성과 기술 중립성을 갖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다시 이 질문을 들여다보면 어딘가 문제가 있다. 원래 전문가의 대립어는 비전문가이고, 노동자의 대립어는 자본가이다. 사회복지사는 분명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이고, 비전문가가 아니라 전문가를 지향한다. 따라서 전문적 노동자이다.

여기에서 푸코의 말이 떠오른다. ‘달을 보라고 하면 달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놈’을 보면서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질까’ 질문하란다. 즉 질문자의 의도, 그가 원하는 효과를 꼼꼼히 따져야한다는 것이다.

사회복지사는 조직가인가, 전달자인가?

사회복지관과 공공기관은 사회복지정책의 주요 전달체계 중 하나이다. 그리고 해당 기관의 담당 공무원 또는 사회복지사들은 많은 경우 전달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고 있다. 사회복지 전달가로서의 ‘전달체계’라는 용어는 중립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사회복지사는 전달자(messenger)가 된다. 전달자는 우편배달부처럼 물건을 수집해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복지사는 우편배달부처럼 단순하게 사회서비스를 전달하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런데 사회복지는 시민들의 자기보존의 욕구, 즉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공적으로 보호받으려는 욕구에 대응하는 것이다. 즉 사회복지는 사람들의 욕구를 알아내고, 조직해 공적인 요구로 만들고 이것을 정책을 매개로 해서 실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복지사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매개자(mediator) 또는 조직가(organizer)이다. 즉 사회복지개론서에서 나오듯이 사회복지사는 공적인 대변자, 조직가, 중재자, 중개자, 조사자 등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사회복지사를 전달체계의 전달자로 인식하는 것은 사회복지사의 역할을 단순한 서비스제공자, 봉사자, 시혜자, 정부의 충실한 지지자로 인식하게 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복지의 상식에 시비걸기를 해야 한다. 이것이 중립적이라는 이름과 명분으로 혹 어떤 그 이면의 누군가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지 않은지를. 그리고 어떤 담론이 특정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고 그 의도가 우리의 실천을 규제하고 있다는 말을 곰곰이 되씹어 보아야하지 않을까.

※‘마중물칼럼’은 사단법인 ‘마중물’ 회원들이 ‘상식의 전복과 정치의 회복’을 주제로 토론하고 작성한 칼럼입니다. 격주로 게재됩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