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과학이야기 50. 수학자 앨런 튜링의 ‘사과’①

가을에는 사과를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요즘 시장 과일가게 명당은 온통 사과가 차지하고 있다. 자잘한 사과 한 봉지를 사 두었다가 가을 하늘이 펼쳐진 길을 걸으며 한 입 베어 무는 것은 팍팍한 생활 가운데 잠시 누릴 수 있는 소소한 낭만이다.

사과를 오로지 맛과 기분으로 느끼는 나 같은 사람도 있지만, 프랑스 화가 모리스 드니(1870~1943)는 역사 속에서 사과 세 개를 골라냈다. 바로 ‘인류를 움직인 세 개의 사과’. 첫 번째 사과는 성경에 등장하는 이브가 먹은 사과다. 이 사과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두 번째 사과는 떨어지면서 뉴턴에게 중력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

세 번째 사과는 화가 폴 세잔이 그린 사과다. 그는 끊임없는 색체와 형태 연구를 거듭해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담으려 했다. 그의 작업 중 색체는 마티스 등 야수파에게, 형태는 입체파인 피카소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번 과학이야기는 ‘네 번째 사과’라 불리는 어떤 ‘사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앨런 튜링(1912~1954)이라는 수학자가 있었다. 그가 조용한 저택에서 마흔 세 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을 때, 그의 옆에는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놓여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학적인 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8세인 1931년 캐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하면서 확률론ㆍ통계학ㆍ수이론 등 수학이론에 점점 빠져들었다. 1937년에는 ‘계산 가능한 수와 문제 응용에 관하여’라는 의미 깊은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튜링 기계’라는 가상의 계산기 이론이 실려 있었다.

튜링 기계는 정보를 기록하는 ‘무한히 긴 테이프’, 정보를 해독하는 ‘헤드’, 헤드와 정보를 주고받거나 헤드를 조종하는 ‘제어부’만으로 복잡한 수학적 계산을 할 수 있는 계산기다. 튜링은 ‘알고리즘(=문제를 푸는 절차)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문제를 기계로도 풀 수 있다는 뜻’이라며, 이 기계에 대한 이론을 정립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에 대한 최초의 이론이다. ‘무한히 긴 테이프’와 ‘헤드’ 그리고 ‘제어부’는 메모리칩, 입출력장치, 중앙처리장치(CPU)로 발전했다.

1939년 9월 4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바로 다음 날부터 영국 정부암호학교에는 영국 최고의 수학자와 암호학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독일군의 암호체계인 ‘에니그마’를 풀어야했기 때문이다. 수수께끼란 뜻의 에니그마는 타자기처럼 사용하는 암호기로, 문장을 입력하면 기계가 돌아가면서 암호화된 문장을 만들어냈다.

A를 입력하면 G가 출력되는 식이었다. 암호규칙은 하루마다 바뀌어서, 24시간 이내에 암호를 해독해내야 했다. 에니그마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암호로 꼽혀 독일 수뇌부는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튜링은 1940년 ‘봄브’라 불리는 기계를 만들어 본격적인 암호 해독에 들어갔다. 봄브는 암호문의 배열을 단 몇 시간 안에 풀어냈다. 독일 잠수함의 위치와 공격 계획을 훤히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영국 상선들은 독일의 대형 잠수함을 피해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날랐다. 영국은 암호 해독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공격을 늦추는 전술까지 사용했다. 결국, 1943년 승승장구하던 독일 해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독일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내부 스파이를 의심했을 뿐이다.

전쟁이 끝난 뒤 튜링은 국립물리학연구소와 맨체스터대학에서 컴퓨터 개발 작업에 몰두했다. 인간의 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기계에 대한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1951년엔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

그러던 그가 이듬해, 경찰에 체포됐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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